▲2012년 11월 14일 경북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태사공 묘에서 파평윤씨 시조 '고려태사윤공신달' 추향제가 열렸다. 참석한 후손들이 제례 순서에 따라 참배하고 있다. 하단엔 약 천여 명의 종친들이 부복해 절을 올리고 있다.
윤도균
제21세 윤돈, 처가 재산 상속
두 요인에 더해, 신속한 성장을 도운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윤돈이 논산에 평생 정착하게 된 데는 처가인 류씨 가문에 남자 후계자가 없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위의 이연숙 논문은 윤돈의 논산 정착에 밑바탕이 된 것은 "처가로부터 상속받은 전답 174마지기와 노비 17구"였다면서 윤돈과 그 후손들이 류씨 가문의 제사를 책임지는 대신 그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설명한다.
이런 가운데, 윤돈 혈통은 16세기 이후의 당쟁에도 적극 개입했다. 이들은 개혁세력인 사림파(유림파)가 서인당과 동인당으로 갈라질 때 서인당 편에 섰다. 서인당이 노론당과 소론당으로 분화될 때는 소론당 편에 섰다. 그런 뒤 소론당에서 지도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윤돈에게서 윤창세가 태어나고 윤창세에게서 제23세 윤황이 태어났다. 윤황에게서 제24세 윤문거·윤선거 등이 출생했다. 윤석열 가계는 윤문거에 기원을 둔다. 한편, 윤선거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소론당 지도자인 제25세 윤증이다. 윤증은 이 가문이 배출한 가장 유명한 당파 지도자 중 하나다.
윤증이 소론당 지도자가 된 것은 일차적으로는 그 자신의 리더십과 학문적 역량에 기인하고, 이차적으로는 가문이 지닌 특별한 지위에 기인했다. 이 가문이 성리학 분파를 이끌고 있었다는 점이 그의 정치적 지위에 결정적 작용을 했다.
가문이 혈연공동체일 뿐 아니라 경제·정치·문화·교육 공동체 역할까지 하던 시절이다. 학문과 교육도 주요 선비 가문들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그래서 유력한 선비 가문은 지금의 대학과 비슷했다.
그런 가문의 계승자들은 대학총장이나 이사장 비슷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고, 학문과 정치가 상통했기 때문에 정치지도자 역할까지 수행하는 경우가 있었다. 윤증이 소론당 지도자가 된 데는 이런 메커니즘이 결정적 도움을 제공했다.
그런데 애초에 서인당의 학문적 구심점은 율곡 이이(1536~1584)와 우계 성혼(1535~1598)이었다. 율곡의 학문은 김장생을 거쳐 송시열에게 계승됐다. 한편, 성혼의 학문은 윤증의 할아버지인 제23세 윤황에게 계승됐다.
제23세 윤황, 우계 성혼의 사위
성씨 가문이 갖고 있던 학문적 정통성이 윤황을 통해 윤씨 가문으로 이전된 배경이 있다. 2007년에 <유학연구> 제15집에 실린 최근묵 충남대 명예교수의 논문 '명재 윤증의 학문 연원과 그 학맥'은 성혼이 아버지 성수침의 학문을 가학(家學)으로 전수받은 뒤, 윤황·윤전 두 형제가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고 말한다. 그런 상태에서 윤황이 성혼의 사위가 되어 정통성을 계승함에 따라 성혼의 가학이 논산의 파평 윤씨들에게 넘어갔다고 설명한다.
류씨 가문과 만난 뒤 논산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성씨 가문과 만난 뒤 성리학 명문가로 우뚝 선 논산의 파평 윤씨들은 그 뒤 소론당의 구심점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에 번영을 구가했다.
오늘날의 재벌에 비견되는 벌열(閥閱) 반열에 오른 이 가문은 광해군 다음인 인조시대부터 구한말 고종시대까지 커다란 굴곡 없이 안정적 성장을 구가했다. 1996년에 <조선사 연구> 제5집에 게재된 차장섭 삼척산업대 교수의 논문 '조선 후기 벌열과 당쟁'은 소론 가문들 중에서 인조시대부터 고종시대까지 일관되게 번영을 이어간 가문은 동래 정씨와 더불어 파평 윤씨뿐이었다고 설명한다.
제35세 윤석열, 김건희와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