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졸업식에 참석한 윤보선 대통령과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연합뉴스
이틀 뒤인 9월 27일에는 박정희의 과거 친일 행적뿐 아니라 그와 '현재의 일본'의 관계에 대한 공격도 나왔다. 국민의당 후보인 허정 전 대통령 권한대행은 박정희의 정치자금 일부가 일본에서 나오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날 발행된 <경향신문> 톱기사는 "허정 씨는 박정희 씨가 일본인 회사로부터 1천만 원 이상의 수표 4매를 받았다고 폭로하여 주목을 끌었다"고 보도했다.
허정은 일본 유력 잡지에서 박정희의 4천만 원 이상 수수설(說)이 보도됐다고 하면서, 이것이 한일회담 협상에서 일본에 양보해주는 대가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공공연히 한국 측이 한일회담을 양보하는 대신 정치자금을 받는다는 설이 유포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굴욕적인 1965년 한일협정의 징조가 2년 전 대선에서도 언급됐던 것이다.
1963년 9월 27일 민정당의 청주 유세 때는 박정희에 대한 조롱조의 비판도 나왔다. 민정당 찬조 연설원으로 등단한 김사만(金思萬)은 "박정희는 그렇게 민족을 아낀다는 사람이 일본제국주의 군인이 되겠다고 만주 군관학교를 거쳐 더 출세하겠다고 일본에 가지 않았느냐?"고 외쳤다. 박정희가 만주 군관학교에 이어 일본 육사까지 진학한 사실을 조롱했던 것이다.
야당의 비판은 계속 이어졌다. 선거 사흘 전 발행된 10월 12일 자 <동아일보> '민정당 찬조연설 요지'에 따르면, 훗날 대통령이 될 김영삼은 '친일이 민족주의냐'라고 비판했고 이충환은 "박 의장은 일본 장교로서 총칼을 가지고 일본에 충성한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마치 약방의 감초처럼, 공산당 경력과 더불어 친일 경력이 유세 현장에서 끊임없이 회자됐다. 야당 붐이 일던 때였으므로 유권자들의 뇌리에 '박정희=친일파'가 어느 정도 각인됐으리라고 볼 수 있다. 박정희가 46.64%, 윤보선이 45.09%였으니, 남로당 이력과 더불어 친일 이력 역시 근소한 표 차이에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대선 후에도 회자
박정희의 친일 본질을 폭로하는 게 효과적이었다는 점은 10·15 대선 직후에 치러진 11·26 총선을 위한 선거운동에서도 나타났다. 제6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이 총선에서도 박정희의 친일 행적이 여전히 도마 위에 올랐다.
11월 12일 자 <동아일보> 2면에 따르면, 그 전날 민정당 박두만 후보의 찬조 연설자로 나선 윤보선 최고위원은 "대한민국보다 일본에 더 충성을 하려는 친일정권"이라고 박 정권을 규정했다. 이 기사는 "박정희 씨는 전일에 일본 군복을 입고 일본 군도를 차고 일본 천황에 충성을 다한 사람이므로 지금도 일본이라면 맥을 못 추고 있다고 꼬집었다"며 윤보선의 연설을 인용했다.
14일 자 <조선일보> 2면에 의하면, 윤보선은 13일 경남에서는 "(5·16) 혁명정부를 친일정권으로 본다"며 일본인들이 10·15 대선 결과를 기뻐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 기사는 "거제·진해·마산 등지에서 연설한 윤씨는 '일본 사람이 박정희 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좋아하고 있으며 한일회담의 흥정에 있어서도 일본에 양보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고 보도했다.
이날 윤보선은 박정희가 한국 경제를 일본 경제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적당한 돈을 받고 한일협정을 체결해 한국을 노예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2년 뒤부터 일어날 일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박정희는 대통령 입후보 12일 전인 1963년 8월 30일 군복을 벗었다. 대한민국 국군 군복을 벗은 직후에 개시된 그해 대선 운동에서, 그가 일본 군복을 입었던 시절이 집중적으로 회자됐다. 1963년 대선 때의 친일 논쟁은 유권자들의 뇌리에 있던 '국군 소장 박정희'를 '일본군 중위 박정희'로 대체시키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다.
친일 논쟁은 박정희 낙선이라는 결과를 낳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1위·2위의 표 차이를 좁히는 데는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윤보선이 그 직후 총선에서도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친일파 박정희' 이야기가 유권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이 이야기는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여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여전한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친일파 박정희' 이야기는 1963년 대선을 계기로 부각된 우리 사회의 고전(classic) 같은 이야깃거리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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