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7월 2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개표 장면.
조선일보
1948년 7월 20일 오전 10시 18분 이승만 국회의장의 선포로 개시된 국회 간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김구를 찍은 표가 13표 나왔다. 이승만을 찍은 180표보다 훨씬 적지만, 불출마 의사를 명확히 밝힌 인물에게 13표나 나왔으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날의 개표는 의원들이 지켜보는 속에서 한 표, 한 표 나올 때마다 현황판에 적어 넣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유력 주자들이 참여를 거부해 이승만 당선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진행된 이날 개표 현장에서는 이따금 탄성이 흘러나왔다. 7월 21일 자 <경향신문> 1면 톱기사는 "이승만, 이승만 연호하는 의사당 내는 물을 끼언진 듯 고요하다, 이따금 김구 씨의 표가 나오면 경이(驚異)의 소리가 들려온다"고 보도했다.
김구를 찍은 13표는 엄밀히 말하면 무효표였다. 단순한 불출마도 아니고 분단정부를 반대하며 불출마를 선언했으니 대선 자체를 부정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김구를 찍은 표를 유효표로 인정하면 대선 자체는 물론이고 대한민국정부의 정당성에도 의문이 제기될 여지가 있었다.
그 열세 명의 의원은 개인적으로 김구를 존경하거나 지지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나름의 뜻이 있었을 수도 있다. 비록 분단 국회에 몸을 담기는 했지만 그 문제점을 인식하는 의원들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13표가 나왔으니 의미는 있었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해프닝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같은 해프닝이 벌어지게 된 것은 입후보 절차를 사전에 갖춰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거 사흘 전인 7월 17일 제33차 국회 회의에서 후보를 사전에 선출해두는 문제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지만, 결국 '각자가 생각해둔 인물을 투표용지에 적어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런 상태로 대선이 치러지다 보니 김구에게도 상당한 표가 나왔던 것이다.
"시방부터 개회하겠습니다"라는 신익희 부의장의 개회 선언으로 시작된 제33차 회의를 담은 국회 속기록에 따르면, 오늘날의 컷오프와 비슷한 방식으로 후보들을 추려낸 뒤 이 후보들을 놓고 대선을 치르자는 의견이 회의 중에 상당한 힘을 얻었다. 출마 희망자 자신이 입후보하는 방식이 아니라 국회가 예비선거를 통해 후보들을 선정한 뒤 이들을 대상으로 선거를 치르자는 것이었다.
이 방식이 회의 중에 힘을 얻은 이유는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출신인 이청천 의원의 발언에서 알 수 있다. 원래는 지청천이었지만 독립운동 중에 이청천으로 바뀐 그는 이날 회의에서 예비선거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속기록에 따르면 "그분들에게 (사전) 승인을 받어야 합니다"라며 "그렇지 않고 뽑아 놨다가 나오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라고 발언했다.
당선돼도 수락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김구 같은 인물이 선출될 가능성을 막기 위해 예비선거를 하자는 것이었다. 예선을 통해 당사자의 의사를 확인한 뒤, 대통령 취임 의향이 있는 인물들을 7월 20일 본선 후보로 올리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이 의견은 채택되지 않았다. 정부수립 일정이 바쁘다는 것과 헌법 규정에 그런 절차가 없다는 점 등이 감안됐다. 그래서 입후보 절차도 마련하지 않은 채 7월 20일 대선을 치렀고, 그러다 보니 수락 가능성이 거의 없는 김구에게도 13표나 나오게 됐던 것이다.
수락 가능성이 거의 없는 서재필도 1표를 받았다. 김구를 찍은 표는 유효표로 인정된 반면 이 표는 무효표로 처리됐다. 그렇게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은 서씨 성을 가진 의원이었다. 위의 <경향신문> 기사는 "서재필 박사의 표가 나오자 돌연 장내는 동요"했다면서 서우석 의원이 등단하여 "서 박사는 미국 시민이다. 그러한 분을 선거한다는 것은 우리 국회의 자기 모욕이다"라고 주장하여 결국 관철시켰다고 보도했다.
의원들이 마음에 둔 인물을 찍는 선거였기에, 아무나 찍어도 무방한 선거였다. 이날 서우석 의원은 이런 식의 선거에서는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재임 1945~1953년)을 찍어도 되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만일 트르맨 대통령을 선거해도 우리 한국의 대통령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목청을 올렸다. 장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위 기사는 말한다.
하지만, 의원들은 김구가 받은 표들에 대해서는 이의를 걸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이 역시 무효로 처리해야 마땅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일이 그날 오후 부통령 선거에서도 재연됐다. 대통령 선거 때처럼 입후보 절차 없이 치러진 부통령 선거 제1차 투표에서 김구가 독립운동가 출신인 이시영(113표)에 이어 65표로 2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 선거에서 김구는 결선투표까지 진출했다. "재적 의원 3분지 2 이상의 출석과 출석 의원 3분지 2 이상의 찬성 투표로써 당선을 결정한다"는 1948년 헌법 제53조 제2항에 따라 132표를 받아야 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이승만 편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의 이시영이 132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결선 투표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결선에서 김구는 62표를 받아 낙선했고 이시영은 133표를 받아 부통령에 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