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노태우씨가 선서하는 모습.
연합뉴스
10월 26일 세상을 떠난 노태우씨는 신군부 정권 2인자이기는 했지만, 단순한 2인자로만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정권 내에서 두 번째였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2인자이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주목 받은 여타의 2인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이승만 정권 2인자인 이기붕이나 박정희 정권 2인자인 김종필과 크게 달랐다. 이기붕과 김종필은 1인자 지위를 끝내 잇지 못했을 뿐 아니라 1인자의 아랫사람이라는 이미지도 떨쳐내지 못했다. 그에 반해 노태우는 전두환을 뒤이어 대통령이 됐을 뿐 아니라, 신군부 정권의 출현 및 존속 과정에서 어느 정도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했다.
그의 위상은 전두환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장)과도 달랐다. 장세동 역시 신군부 정권 성립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지만, 그는 전두환의 수족 같은 부하라는 이미지를 끝내 탈피하지 못했다.
12.12 쿠데타, 노태우의 지분
10·26 사태 합동수사본부장인 동시에 국군보안사령관인 전두환 소장이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한 1979년 12·12 쿠데타는 전두환의 주도로 일어나긴 했지만 노태우 9사단장의 결단이 없었다면 성공하기 어려웠다.
12·12 때 반란군에 맞서 싸운 장태완 육군 수도경비사령관의 회고록인 <12·12 쿠데타와 나>에 따르면, 1979년 12월 12일 저녁 6시에 전두환이 정승화 연행을 지시하고 7시 15분에 서울 한남동 육참총장 공관에서 첫 총성이 울리고 7시 25분에 정승화가 공관 밖으로 끌려나온 뒤부터 대결 상황을 주도한 쪽은 반란군이었다.
그러다가 저녁 8시에 장태완이 수경사령부에 도착한 뒤부터 정부군이 대응 태세를 갖췄다. 장태완이 밤 10시에 한강 교량을 차단해 반란군의 강북 진출을 막고 10시 50분에 반란군 수뇌부에 대한 공격 준비 명령을 내린 뒤부터는 전두환 측이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 공수부대의 가담과 더불어 노태우의 9사단 출동 명령이다. 11시에 노태우는 참모장 구창회에게 전화를 걸어 전방의 9사단 병력을 서울 중앙청(광화문 안쪽) 앞으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했고, 9사단 29연대는 13일 새벽 1시 30분에 서울 북부 구파발을 통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