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학습과 표준전과의 이미지지금 40대 이상은 이 책들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다.
'책과 함께'제공
경찰이 뒷담 근처에 CCTV를 설치하고 돌아갔을 때 부부는 "열쇠 좀 튼튼히 해놓지 허술하게 하니 뜯고 들어왔잖아", "푼돈 가져간 것 갖고 뭘 그래, 잡아보면 또 애기들 짓이지" 하며 티격태격했다.
사실, 초등학교 앞에서 오랫동안 가게를 하다 보니 꼬마도둑들과 부대낀 사연은 적지 않다. 학생들이 많았던 시절 등교 시간에는 몇백 명이 몰려드니 구슬 몇 알, 껌 한 통 집어가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장사를 시작하고 서너 해가 되었을까? 늦은 저녁을 먹고 부부는 일일연속극 <수선화>에 넋이 빠져 있었다. 밖에서 유리창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몇 차례 들려 최영숙이 남편에게 나가보라고 재촉했다. 살림방과 가게 사이에는 미닫이문만 있을 뿐이어서 스스륵 열고 나갔더니 돈통이 안 보였다.
좀도둑들이 더러 푼돈을 집어갔어도 이렇게 통째로 들고 간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세웅이 튕겨지듯 밖으로 나가 보니 달빛이 구름에 숨었는지 어둠은 장막 같았다. 개구리 울음 속에서도 뒷골목 뽕나무밭으로 흩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부산했다. 이세웅은 한 발 한 발 뽕나무밭을 둘러싼 탱자나무 울타리로 다가갔다. 따라 나온 최영숙이 "위험허니 날 밝으면 찾아보자"라고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뽕나무밭으로 달려갔을 때는 돈통만 덩그러니 엎어져 있었다. 경찰이 나와 동네에 이리저리 탐문을 해 보니 떡 가게도 지난 밤에 털린 상태였다. 마을에 난리가 났지만 잡고 보니 꼬마 도둑들! 중학교를 안 간 우두머리 녀석이 초등학생 서너 명을 데리고 벌인 일이었다.
녀석들은 농협창고 옆에 쌓아놓은 볏짚단 사이로 아지트까지 만들어 훔친 물건을 쟁여놓고 있었다. 어린 학생들을 어찌하겠는가. 부부는 떡 가게와 함께 아이들을 타이르고 없던 일로 묻어 버렸다.
문방구에 바친 부부의 인생
1944년생 이세웅과 1946년생 최영숙은 72년 3월 12일에 결혼해 벌써 50년 동안 한솥밥을 먹었다. 광주 출신의 이세웅은 군대를 다녀와 '농촌지도직'에 합격해 담양군 대치리로 발령을 받았다. 한의원이었던 문약방에서 자취하던 그는 71년 늦가을, 십 리나 떨어진 행성리의 최영숙을 소개받았다.
이세웅이 그녀를 만나러 집으로 찾아간 날, 마침 다림질을 하고 있던 최영숙은 이세웅에게 옅은 눈인사를 보냈다. 이세웅은 침을 삼키면서 뒷산 대나무숲에서 내려온 소슬바람만 바라보았다. 최영숙은 그 첫 만남을 "키도 크고 깎은 밤처럼 훤해 마음이 가더라구요"라고 기억한다. 그 후로 일사천리, 편지가 몇 번 오고 가고 양가집에서는 서둘러 날을 잡았다.
공무원인 '농촌지도직'의 월급은 보잘 것없어 이세웅은 개인회사로 옮겼다. 최영숙의 말을 빌면 "농촌지도직보다는 나았지만 그 월급도 쪼깐했다"고 한다. 결혼하자마자 들어선 첫째, 그리고 이어 가진 둘째, 세째 세 아들을 보란 듯이 키워내려면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마침 한재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친척이 "학교 앞에 문구점이 나왔으니 가게를 해 보라"고 권했다. 대치서점의 시작이었다.
79년에 문을 연 대치서점은 이세웅이 2000년 정년퇴직하기 전까지는 온전히 최영숙의 몫이었다. 7남매의 이세웅, 10남매의 최영숙은 양가집에서 받은 게 덕담뿐이어서 송곳 하나 꽂을 땅조차 없었다. 남편은 직장에서, 아내는 문방구에서 부지런히 벌어야만 했다.
대치리는 대전면 면소재지답게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만명이 넘는 주민들이 북적거렸다. 한재초등학교 아이들이 천오백 명을 넘었고 한재 중학교 학생 수도 700~800명에 이르렀다. 마을에 다섯 개나 되는 문방구가 있었고 대치서점만 해도 하루에 수백 명이나 되는 꼬마손님들이 드나들었다.
등교시간에는 눈도 손도 바빴다. 라면땅에 왕사탕같은 군것질거리, 연필에서 지우개, 찰흙에 수수깡을 사며 아이들은 10원, 20원을 내밀었다. 최영숙은 일단 그놈을 받아서 비료 푸대에 넣기 바빴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구슬하고 딱지 집어 내빼는 놈들이 부지기수, 쫒아갈 수 없으니 그러려니 했다.
최영숙은 늦은 오후가 되면 동생에게 가게를 맡기고 광주로 매일 물건을 떼러 다녔다. 어린 손님들이어도 눈이 까다로워 새 물건이 없으면 다른 가게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마을에 하나로마트나 농협연쇄점이 없어 대치서점은 만물상 노릇까지 겸했다. 비누와 치약을 사다 달라는 이웃도 있었고 백과사전을 사다 달라는 맞춤형 주문도 있었다.
버스를 타고 광주 충장로에 내리면 그때부터 도매상을 찾는 최영숙의 발걸음이 바쁘다. 문구는 상고당과 영화사를 들르고, 완구는 크로바에서, 과자는 일이삼에서 몇 박스씩 샀다. 그 물건을 도매상 직원들이 버스정류장까지 옮겨주면 삼양사로 직장을 옮긴 이세웅이 퇴근하자마자 달려와 버스에 실었다.
이세웅의 애로도 컸다. 아내 혼자 물건을 나르게 할 수는 없었기에 퇴근 후면 소주 한 잔 하자, 고스톱 한 판 하자는 동료들 손길을 뿌리쳐야만 했다. 퇴근 시간이니 버스는 만원이고 "왜 하필이면 지금 시간에 물건을 싣는냐"는 핀잔이 쏟아졌다.
그 시절 버스는 돌연 서 버리는 일도 잦아 담양으로 들어가는 시외버스를 갈아타려면 한 시간을 기다린 적도 많았다. 부부는 이제나 저제나 버스가 올까 어둔 신작로를 보며 배를 곯고 기다릴 3형제 생각에 마음을 동동 굴렀다.
그렇게 집에 도착해 아이들 밥 먹이고 떼온 물건들을 정리하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하루 내내 굽이쳐 흘러갔던 영산강도 다음 날 여행길을 준비하며 잠자리에 들 시간까지 부부는 대치서점의 낮은 등불을 밝혔던 것이다.
5인조 도둑 일당을 붙잡고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