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로 일한 지 10여년 만에 나를 지체 없이 퇴사의 길로 이끈 '쓰리 콤보'가 있었으니...
픽사베이
'뼈를 묻으리라' 생각하던 일터에 지난달 작별을 고했다. 대한민국 어디에나 있을 편의점 주말 아르바이트 자리였지만, 지병이 많은 나에게 우리 점포는 그야말로 구원이었다. 변화가 적고 호의적인 근로 환경에서 건강이 더 나빠지지 않게 관리할 수 있었고,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며 글을 쓸 시간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 눈치 없는 반려질병 중 한 녀석이 몇 년 전 동반질환을 하나 더 데리고 왔다. 별 수 없이 이 병도 꾸역꾸역 데리고 살았지만, 점차 증상이 심해져 결국 나는 조용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어머니의 '등골 브레이커'가 되지 않기 위해 떠났던 본가로 말이다.
그럼 이제 이 사회에서 내 위치는 어디쯤이라고 볼 수 있을까? 프리랜서라고는 해도 체력이 부족해 월 소득은 20~30만 원을 유지하기 빠듯하고, 사회활동에 제약이 많으나 장애등급에는 속하지 않는다. 근로는 하지만 고용보험과 국민연금 제도에 참여하지 않고, 부모나 동거인에게 의식주를 일부 의탁하고 소비를 최소화하며 산다. 한마디로 자생력이 떨어지긴 하는데 국가에서 기초 생계를 책임지거나 지속적으로 지원할 대상으로 보기는 어려운, 애매한 존재다.
나는 이런 '틈새의 사람들'이 상당수가 되는 시대 흐름, 그리고 기본소득제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편의점에서 일하기 전엔 글 쓰는 일과 병행하겠다며 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추가 업무를 소화하느라 늘 휴일이 없었고, 적은 급여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부업을 했다.
강사로 일한 지 10여년 만에 나를 지체 없이 퇴사의 길로 이끈 '쓰리 콤보'가 있었으니, 부당한 처우 때문에 과로하는 과정에서 몸이 상했고, '시간강사법'의 시행으로 재계약이 어려워졌으며,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외국인 유학생이 대폭 줄었다.
갑작스러운 사건·사고나 예측 불가능한 제도의 변동으로 재산이나 지위, 일상을 잃은 사람들, 장애나 질병 진단을 받지는 않았지만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거나 조직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워 안정된 미래를 계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 도처에 있다. 이들은 '노력하지 않는다', '현실적이지 못하다'라는 오해를 받으며 백수나 룸펜, 루저 등의 이름으로 평가절하되곤 한다.
4차 산업혁명은 기본소득이랑 무슨 상관이길래
2차 산업혁명기의 생산직 정규직 근로자 보호를 위해 발전해온 지금의 사회보장 제도는, 대상 선별에 엄청난 행정적 비용을 소모하면서도 많은 사각지대를 만들어낸다. 사업장의 근로 증빙을 받기 어려워 코로나19 특고·프리랜서 지원금을 신청하지 못한 경우부터 2014년 서울 송파구 세 모녀 사건과 같은 비극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를 외면하기 어려운 것은 이렇게 지원에서 누락되는 계층이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9년 고용 전망(Employment Outlook)' 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인공지능과 자동화로 실직 위기에 놓이는 근로자의 비중을 전체의 43.2%로 예측했다. 최근 골목골목을 파고드는 무인매장을 보면 이미 미래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생 사업은 고도로 전문화된 분야가 대다수기에 저숙련 노동자들이 이직하는 데에는 현실적으로 벽이 높고, 긴 직무 훈련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에서 국민들의 기초 생계를 지원하는 '기본소득'은 장기 실업 상태에서 재취업을 준비하고 경제활동을 독려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
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 것이 단순히 복지의 차원만은 아니다. 경제적인 관점의 정책으로 접근하는 논의도 있다. 무인자동화 체계가 일반화될수록 구매력을 가진 사람이 줄어들어, 역설적으로 물건이 팔릴 가능성은 낮아진다. 소비가 위축되면 곧 경기 침체와 저출생으로 이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기본소득은 흔들리는 사회 구조를 보완하는 장치가 된다.
기본소득제, 포퓰리즘일까 보편 복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