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순종과 인정, 존경에 관한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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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배균(bact84)등록 2021.10.13 13:56
  얘들아, 선생님 말 좀 들어봐!
 
  "야~, 이 녀석들아, 조용히 좀 해!" S고의 김 선생. 그는 모든 학생들이 그의 말을 잘 듣고 따라주길 바란다. 스승으로서 존경도 받고 싶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 "맨 뒤에 계속 딴짓하는 놈, 앞으로 나와."
 
  대다수의 학생들은 그의 말을 잘 따르지만, 몇몇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 "이놈아,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지, 왜 계속하는 거야?" 말리면 더하고 싶고, 하라고 하면 더 하기 싫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보다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이 더 즐겁다는 것을 그도 안다.
 
  딴짓하는 학생들은 늘 있고, 이들을 지도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 중 하나라는 것을, 이들이 없는 학교를 바라는 것은 교사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셈이라는 걸 그는 잘 안다. 그런데 왜 그는 무지개 같은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가? 욕망이 좌절되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왜 마음을 못 비우는가?
 
  그는 행복한 학교생활을 위해서는 모든 학생이 그의 말을 잘 듣고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교육이 잘 이루어질 수 있고, 교사로서 보람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 선생님, 순종은 수동성과 의존성을 내포하는데, 학생들이 순종하기를 바라면서,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교육을 할 수 있을까요?
 
  딴짓하는 학생들에게 측은지심이 아니라 화가 나는 자신을 보면, 자신의 욕망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원망과 화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어휴, 이놈들 때문에 내가 못 살아, 정말."
 
  "김 선생님, 늘 있는 존재는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아니에요. 하루하루 좌절하는 욕망은 버리는 것이 좋고, 매몰 비용 처리는 빠를수록 좋아요."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쏟은 노력을 매몰 비용 처리하면 너무 허탈할 것만 같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말이 안 들려? 왜 웃어?" "왜 그러세요? 저 아무 짓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는데요?" 학생들은 그를 무시하기 위해 잠을 자고, 떠들고, 핸드폰을 하고, 다른 과목을 공부하는가? 아니다. 저마다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다. "저는 정시파라 내신은 신경 안 써요." 나름대로 선택과 집중을 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는 화가 난다. 무시당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김 선생님, 학습권이란 수업을 듣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는 의미이고, 교사는 수업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의무가 있는 거예요.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보나 마나 뻔해!
 
  화는 그를 일반화의 오류에 빠뜨린다. "이거 참, 말도 징그럽게 안 듣네. 요즘은 학생다운 녀석들이 없어. 아, 속 터져.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 거야?" 영화 예고편을 보면, 몇 개의 토막 난 자극적인 장면으로 기승전결을 상상하고 재미를 판단한다. 그는 예고편 보듯이 몇 개의 문제적 장면들로 학생들의 과거와 미래, 세상의 미래까지 때론 추론한다.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면 세상이 단순명쾌하게 보인다. "될 놈 될, 안 될 안이라고들 하잖아. 그 녀석은 안 돼." 단순명쾌함은 이내 편견으로, 확신으로, 고집으로 돌고 도는데, 편견에 누가 태클 걸면 화를 참지 못하는 교사들을 그는 본 적이 있다.
 

  학생인가? 고객인가?
 
  인권보다 고객을 우선시하는 소비자본주의는 고객의 진상 짓을 조장하고 노동자의 멘탈을 무너뜨린다. 학교에서는 고객처럼 진상 짓을 하는 몇몇 학생들이 교권을 침해한다. "학생들이 거짓말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입만 열면 거짓말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요." "적반하장만 안 해도 좋겠어요. ㅠㅠ" 민주주의와 인권은 계속 신장했는데 교권은 흔들린다. "인권과 교권은 밀당 관계인가? 모순 관계인가?" 그는 혼란스럽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수업 시간 중에, 훈계하는 것이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안다. "자, 집중! 여기 좀 보란 말이야. 시험이 코앞인데, 지금 뭐 하는 거야?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인생 X되는 거 아직도 몰라?" 화가 나서 훈계를 하면 학생들이 곱지 않게 반응하고, 그 때문에 자신이 더욱 화가 난다는 것을 그는 안다. 딴짓하는 학생들을 변화시키기 힘들다는 것을, 사람이 사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자신만이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안다. 하지만 그는 훈계를 멈추기 힘들다. 지친다. 힘겹다.
 
  "김 선생님, 사람의 내면에는 이타성과 이기성, 도덕과 비도덕이 공존하므로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요. 가면에 가려진 학생의 마음을 읽지 못한 채 훈계하면 별 효과가 없어요."
 
  수업이 아닌 상황에서 학생들의 아픔을 경청하고 공감하면 측은지심이 생긴다는 걸 그도 알지만, 힘들어서, 그도 말하고 싶어서 때론 귀가 닫힌다. "아, 어쩌란 말인가?" 그때그때 딴짓을 제지하면서 그는 또 수업을 한다.
 
 
  이게 최선인가?
 
  그는 자신이 최선을 다했는지 의심이 든다. 자존심이 상한다. 왠지 나쁜 학생들에게 진 것만 같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그를 이겨 먹는 학생들이 밉다. 사랑해서 줬지만 준 만큼 돌려받고 싶다. 받으면 예쁘고 못 받으면 밉다. "내 사랑은 이기적인 조건부 사랑인가?"
 
  "김 선생님, 무지개는 잠시나마 눈에 보이기라도 하지만, 최선은 정체가 불분명한 환상 같아서, 최선(?)을 다해 자신을 밀어붙이면 지쳐 쓰러져요."
 
  "난 최선을 다했어. 자기들 멋대로 살겠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어? 자기 인생 자기가 사는 거지 뭐." 그는 후회도 고집도 합리화도 싫다. 그는 덤불에 머리 박은 꿩처럼 되기 싫다. 하지만 자괴감이 밀려오면 합리화를 한다.
 
 
  지적은 노! 인정은 예스! 존경은 땡큐!
 
  그는 유능하다고 인정받고 싶다. 스승으로 존경도 받고 싶다. 하지만 지적받을까 봐, 할 일이 생기면 종종 불안하다. "전 괜찮아요." "전 뭐든 상관없어요." "맘대로 하세요." 불안을 애써 감춘다. 규정과 공문을 살펴보고 인수인계 받은 대로 일을 처리한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해요?" "이거 제대로 했는지 좀 봐주세요." 그는 불안을 달래려 묻는다. 빨리 해치우고 쉬고 싶다.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그는 힘들다. 책임질 일이 없게 처리하려니 걱정스럽다. 규정이나 공문에 철저히 근거해서 처리하려고 하지만 규정이 애매모호하거나, 규정대로 하기 힘든 예외적인 상황들이 발생한다. "아, 이거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선생님은 이거 어떻게 처리했어요? 선생님은? 선생님은?" 그는 살피고 따라한다. 하지만 따라하기는 그의 주체성을 약화시킨다.
 
  "김 선생님, 사회적 동물의 소속감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할수록 강해지고, 불안감과 반비례해요. 집단주의, 순응, 통일성 등 소속감을 중시했던 과거에는 대세나 유행을 따르며 소속감을 높일 수 있었지만, 개인주의, 혁신, 다양성, 자율 등 불안감을 조장하는 요즘에는 따라하기나 묻어가기로 불안감을 줄이기 힘들어요."
 
  그는 선배 교사들이 업무 협조도 잘 해주지 않으면서 꼰대 같은 소리만 하는 것 같아 짜증이 난다. 협조를 구하느니 자신이 대신 일을 처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일하는 사람만 일하는 것 같다. 독박 쓴 기분이다.

  "김 선생님, 인자무적은 옛말이고, 요즘은 개자무적이라는 말이 떠돌아다녀요. 개기는 자는 아무도 못 이긴데요. ㅠㅠ"

  그는 '안 해'와 '못 해'의 교집합이 불안이라는 것을 안다. 해야 할 일을 '안' 했을 때, 사정이 생겨서 '못' 했다고 변명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겠을 때, 하기 싫어 '안' 하겠다고 스스로 위로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안다. 변명과 위로가 불안을 만성화한다는 걸 잘 알지만, 그는 변명과 위로 없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힘들다. "내가 그렇지 뭐."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내가 뭘 더 바라겠어." 자기 비하 발언은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어 질책과 비난을 면하고, 위로받기 위한, 겸손으로 포장한 방어 기제라는 것을, 자기 혐오, 자기 학대로 악순환한다는 걸 그는 책에서 배웠다.
 
 
  야, 일어나!

  "학교가 호텔이야? 넌 또 뭘 하고 있어? 그만, 그만 해! 공부 못해도 포기만 안 하면 멀쩡히 잘 살 수 있어. 성적 나쁘다고 공부 포기하면 안 돼." 그는 언성을 높인다.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김 선생님, 교사는 무엇보다 수업을 열심히 잘해야 해요."
 
  수업이 아니라 수업 분위기에 힘을 쏟다 보면 수업에 대한 열정이 식는다. 그는 이따금 감정을 억누르며 수업을 한다. 목소리에 힘을 넣기가 힘들다.
 
  "김 선생님, 훈계나 질책은 학생에게 열패감을 안겨주고, 이는 수치, 굴욕으로 변질되어 반항심을 강화시키거나 우울과 무기력에 빠지게 할 수 있어요."
 
  교사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학생을 훈계하면 교사가 가해자가 될 수 있고, 학생들은 혼나는 것이 두려워서 어설픈 변명을 하고, 변명이 자신을 더욱 화나게 만든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좋으면 학생이 수업을 잘 듣는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말 안 듣는 학생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너무 어렵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지만 나를 화나게 하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고운 말을 할 수 있지?" 화를 누르며 자괴감이 올라온다.
 
 
  쌤, 이거 시험에 나와요?
 
  "그래, 자주 나오는 유형이니까 잘 알아둬야 해." 그는 보람 있는 수업을 하고 싶다. 학생들이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업을 하며 유능하다고 인정받고 싶다. 그런데 그는 입시 위주 교육을 해야 한다.
 
  "김 선생님, '학교'의 사전적 의미는 '공부'하는 곳이지만 맥락적 의미는 '공부 대회'하는 곳이에요. 서열 싸움은 모여 사는 생명들의 숙명인가 봐요."
 
  그는 입시 위주 수업이 즐겁지 않다. 보람을 느끼기 힘들다. 그러나 학생과 학부모들의 바람을 외면할 힘이 없는 그는 지적받지 않으려면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현실과 바람은 거리가 멀다. 갑갑하다.
 
  그는 입시 위주 수업으로 유능하다고 인정받을 수는 있지만 존경받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수업이 학생의 삶과 연관되어 학생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때, 고정 관념을 흔들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치고 삶의 희망을 보는 계기가 될 때, 학생들의 마음이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김 선생님, 이타적 행위는 나눔을 지향하므로 승패와 우열이 없어요. 하지만 이기적 행위는 독점을 지향하므로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며 열등감과 우월감의 굴레에 얽매여요."
 
  영웅전에 잘 나타나듯이 존경은 이타성에 바탕을 둔다. 그는 자신의 유능함을 인증하기 위한 수업이 아니라 학생에게 감동을 주는 이타적인 수업을 하고 싶다. 그의 수업에 감동 받은 학생들은 그를 존경하고 순종할 것이라고 그는 기대한다.
 
 
  순종, 인정, 존경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학교에서 학생의 순종은 정의라고, 정의 실현은 교사의 책무라고 그는 배웠다. 그래서 불가능해 보여도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그런데 요즘 그는 순종이 정의나 이상향으로 합리화된 자신의 이기적 욕망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 선생님, 사상(주장)은 욕망의 반영이에요. 즉 누군가가 원하는 삶을 바탕으로 사상을 만들고, 이 사상을 다수의 사람들이 수용하면, 정의가 되어요. 정의는 발견이 아니라 발명이죠. 욕망→사상→수용→정의→정의(욕망) 추구로 순환하므로 정의로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것은 순환논증의 오류라고 할 수 있죠. 한편, 세상이 바뀌면 정의였던 것이 악이 되기도 하죠. 여성들을 지배하고 싶은 남성들의 욕망이 반영된 여필종부, 남존여비 같은 남녀차별 사상은 이젠 악이죠. 만인평등 사상이 정의죠."
 
  "순종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욕망인가? 왜 나는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을까?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왜 계속 무지개 같은 욕망을 좇을까? 사랑받고 싶어서? 행복하고 싶어서?" 욕망이 호불호를 좌우하고, 선악으로 호불호를 합리화하는 자신을 가끔 목격했다. 순종을 바라는 그에게서 존경은 멀어져갔고, 고독은 다가왔다.
 
 
  고마워 행복하다!
 
  "김 선생님, 능력이나 성취에 따라 차별적으로 존중하고 사랑하면 천부인권설을 부정하는 거예요. 조건 없이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자 권리예요."
 
  그는 사랑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가슴 속에 존재하는 것을 찾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창조해야 하는 것이라 믿는다.
 
  "김 선생님, 누가 행복할까요? 함께 웃을 수 있는 만남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에요. 누가 불행할까요? 잘못하고도 성질부리고 변명을 일삼는 사람이에요. '산다'는 '만나다'이므로 행복은 '나'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어요. 나 혼자 승리할 수는 있지만, 행복할 수는 없어요. 행복은 관심과 사랑이므로 함께 웃는 만남이 나의 승리를 우리의 행복으로 만들 수 있어요."
 
  존경은 존중과 사랑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유능함을 인정받은 만큼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누고 배려한 만큼 행복하다는 말이 교직 경력이 늘어날수록 그의 마음에 깊이 스며든다.
 
  "김 선생님, 삶의 비애는 고마움을 우물쭈물 뒤늦게 알아서 생겨요. 그렇지만 늦게라도 아는 게 어디예요. 고마움을 아는 만큼 행복해요."
 
  그는 살려고 일했고, 행복하려고 열심히 가르쳤다. 정답 없는 길 위에서 학생들과 얽히고설키며 답을 찾으러 오늘도 교실에 들어간다. 비바람에 흔들려도 꽃이 아름다운 건 씨앗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 흔들흔들 어질어질, 그는 오늘도 행복의 씨앗을 키운다. 행복해서 고마운 것이 아니라 고마워서 행복하다. 그들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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