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대통령 선거에 부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선출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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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태(heetae88)등록 2021.10.11 19:46
더불어민주당 20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이재명 후보가 최종 선출되었다. 경쟁의 과정은 엎치락뒤치락해야 관전의 맛이 있는데, 이재명 후보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50% 이상씩 득표하며 일찌감치 민주당 후보 경선의 김을 빼놓았다. 대장동 사태가 터지며 위기를 맞는 듯했으나 국민의 힘이 알아서 물 타기를 해 줌으로써 "일단" 위기는 넘긴 듯하다.

지난 19대 대통령 선거는 누가 더 가점(加點)을 많이 받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된 선거라고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특유의 친근한 매력에, 故 노무현 前대통령 가점과 촛불 가점까지 두둑이 챙겨 대통령이 되었다. 내년 3월 9일(당연히 수요일)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대한민국의 20대 대통령으로 선출될지에 대한 예견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다만, 19대 대통령 선거와는 달리 가점이 아닌 누가 감점(감점減點)을 덜 받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가점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받은 감점을 어떻게 상쇄시킬 것인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역설이 관장하는 시대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스스로를 진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역사가 정반합으로 끊임없이 발전한다는 근대적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라는 것이다. 역사 발전의 원리로 작동했던 정반합은 진즉에 깨졌고, 지금은 역설이 관장하는 시대다. 보수화된 김영삼의 역설이 김대중 대통령을 당선시켰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역설이 이명박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의 역설로 권력을 잡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촛불 혁명의 기폭제가 된 국정농단 당시 벼랑 끝으로 내몰렸던 국민의 힘 지지율이 40%을 기록하고 있는 것도 그저 역설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2021년 9월 20일 자 경향신문 참조, 민주당 지지율의 32.5%. 양당의 격차는 7.5%로 오차 범위 밖). 불확실한 시대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 다른 생각을 진보와 보수로 양분하거나, 옳고 그름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을 감지하고 그 위에 올라타는 것이다. 진실이 승리할 수 없다면 차라리 진실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맘이라도 편하지 않을까?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답답함을 견디며 살아간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촛불 시민의 기대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다. 촛불 혁명의 기대 또한 언젠가 역설에 직면하겠지만, 문재인 정부에서는 역설에 직면할 만큼 나아간 것이 별로 없다. 그저 지난 5년 동안 제자리걸음만 했을 뿐이다. 제자리걸음의 주역은 역시 30년 전의 시대 인식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586들이다. 사실 코로나 시대에 제자리걸음만 한 것도 대단한 것일 수도 있다. 나를 포함해 경제 성장에 도취해 남 탓만 하는 시민이 덜 된 국민들도 문제다.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기대는 역설에 부딪힐 만큼이라도 제발 나아가 보자는 것일 수도 있다. 대한민국은 경제가 정치를 이끌어 온 나라다. 그러다 보니 미완의 정치적 과제가 산적하다. 이재명 후보의 지지자들은 이재명이라면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과거의 정치적 잔재들을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

신념의 정치화가 만든 노무현敎
신념은 시간이 지나면 종교화가 진행된다. '발터 벤야민'은 심지어 종교와 하등 관계가 없어 보이는 자본주의도 종교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종교를 주제로 논리적 대화는 불가능하다. 종교는 그저 종교로 인정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을 뒷 받치고 있는 노무현敎가 그렇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밀알이 되듯이 소위 진보를 표방하고 있는 많은 대중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문재인 대통령을 지킴으로서 속죄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난 안티 크리스챤이다. 크리스트를 매우 사랑하지만 크리스트를 안티하는 크리스찬들을 안티한다. 마찬가지로 난 노무현 대통령을 매우 좋아한다. 2009년 잘 다니던 출판사를 때려 치우고 나온 이유도 조직된 소시민으로라도 살고 싶어서였다. 신은 무작정 따르는 존재이지 누군가와 비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 누구도 노무현 대통령의 어깨에 어설프게 올라타려 한다면 노무현敎의 광신도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근대와 대비해 현대를 소위 탈영웅주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그렇다고 현대에 영웅주의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가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가 모두 공존하는 사회이듯, 탈영웅주의 시대에도 여전히 영웅주의가 혼재되어 있다. 탈영웅주의 시대에서는 더 이상 우월한 개인에게 열등한 개인이 동화되지 않는다. 그저 시민 개개인이 모두 영웅일 뿐이다.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치권력도 그러한 시대적 변화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박근혜 꼴이 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박근혜 탄핵은 탈영웅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사건으로 볼 수도 있겠다. 박근혜는 탈영웅주의 시대에 영웅주의적 대통령으로 군림하다가 탄핵되었다.

탈영웅주의 시대엔 n에게 선출되어 n을 대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자신이 그저 1/n임을 알아야 한다. 한 개인의 생각이 집단의 생각보다 우월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개인의 주장이 집단의 주장보다 더 전략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은 그저 1일뿐이다. 탈영웅주의 시대, 한 명의 영웅에 만족하지 못하는 대중들을 위해 기획된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바로 "어벤저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그냥 1이 아니라는 영웅주의적 사고방식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좀비처럼 탈영웅주의 시대를 활보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를 새 시대의 맏이가 되고 싶었으나 구시대의 막내였던 것 같다고 성찰했던 것처럼, 이재명 후보가 영웅주의 시대의 마지막 대통령이 될지, 탈영웅주의 시대를 여는 첫 대통령이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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