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인연

<구덩이> 루이스 쌔커,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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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영(yonbora)등록 2021.10.03 14:19
요즘 주말이면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남녀 주인공의 러브 라인이 한창 달아올라 있는데 그들은 어렸을 적 해변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간 인연이 있다. 물론 기억할 만큼 대단한 추억은 아니기에 단번에 서로를 알아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관계에 필연성을 부여한다. 영화, 소설 등 장르를 불문하고 이런 우연이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이 이야기의 뼈대가 된다. 1999년 뉴베리 수상작인 『구덩이』도 우연과 인연에 관한 이야기다.
 
우연으로 가득한

주인공 스탠리의 가족사는 지독한 우연 아니 불운의 연속이었다. 고조할아버지가 북유럽의 라트비아에서 우연히 갑판원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간 것. 증조할아버지가 주식시장에서 큰돈을 벌어 캘리포니아로 이사하다 무법자 '키스하는 케이트 바로우'를 만나 빈털터리가 된 것. 낡은 운동화를 새 운동화로 바꾸는 법을 연구하는 아버지 덕(?)에 범죄자가 된 스탠리. 학교에서 화장실에 빠뜨린 노트 때문에 버스를 놓치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신발을 머리에 맞은 스탠리. 그리고 그 신발이 지독한 발 냄새의 주인 프로야구 선수 클라이드 리빙스턴의 것이었던 사실까지.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곳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정이지만 누구나 수도 없이 반복하는 레퍼토리일 거다. 우리의 삶은 날실과 씨실처럼 우연과 우연으로 촘촘히 짜여 있다. 삶의 방향을 주체적으로 이끌 만큼 개인의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면 그동안 행운이라는 우연이 선물처럼 주어졌는지도 모른다.

다 아무짝에도-쓸모없고-지저분하고-냄새-풀풀-나는-돼지도둑-고조할아버지를 둔 탓에 스탠리 가족의 삶은 험난하다. 하지만 그들은 우울해하거나 비관하지 않는다. 고조할아버지 탓으로 돌리며 우연으로 가득한 생을 그냥 받아들인다.

오감을 자극하는
 
『구덩이』는 온 감각을 자극하는 4D 영화 같은 소설이다. 1초 꾸물거리면 해 뜰 시간이 1초 더 가까워진다는 생각만으로도 아침에 눈이 번쩍 떠지는 곳이 텍사스다. 그늘막 하나 없이 할당된 구덩이를 파야 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머리 위가 뜨겁고 쩍쩍 갈라지는 땅처럼 내 입술도 마른다.

무슨 지독한 세균이 득실댔길래 사람의 발에서 썩은 생선 냄새가 났을까. 스탠리 아버지는 거리에 나앉을 만큼 궁핍한데도 치료 약 발명을 멈출 수 없다. 숨 막히도록 역겨운 냄새가 폴폴 새어 나오는 듯하고, 집을 비우라고 재촉하는 집주인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된다.

노랑 반점 도마뱀은 등에 열한 개의 반점이 있다. 치명적인 만큼 그 색도 매혹적일 것만 같다. 해를 피해 어스름해지면 기어 나오는 도마뱀의 노랑 반점은 야광처럼 빛날지도 모른다. 악랄한 소장의 손톱은 방울뱀의 독으로 만든 매니큐어로 칠해져 있다. 죽음을 부르듯 사람을 홀리고 복종하게 만드는 소름 돋는 핏빛 빨강일 거다.

방울뱀의 방울 소리는 청명한 울림일까 아니면 도망치라는 신호를 주듯 섬뜩할까. 생양파를 몇 날 며칠 먹은 스탠리와 제로의 속은 속이 아닐 것이다. 껍질을 까기만 해도 코가 찡하고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쨍하면서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 말이다.

도마뱀이 얼굴을 지나간다니 어깨가 움츠러들고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얼굴에 남겨진 발톱 자국이라니. 호흡이 가빠지고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 간다. 물이 귀해서 탈출을 걱정할 필요조차 없는 메마른 텍사스 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스탠리의 생존기. 그 이야기는 생생하고 절절해서 온몸을 들썩이고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든다.

우연은 인연으로
 
스탠리를 감옥에 오게 한 죄의 진범인 제로는 위기의 순간에 스탠리를 구출한다. 그리고 죽음 직전에 이르렀던 제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려냈던 이는 스탠리였다. 또한 스탠리의 고조할아버지가 마담 제로니에게 했던 약속을 스탠리가 그녀의 고손자인 제로를 통해 지켜낸다. 케이트 바로우의 복숭아와 그의 연인이었던 쌤의 양파는 100년 후 엄지손가락 산에서 스탠리와 제로의 유일한 식량이었고 스탠리 아버지의 발명에 종지부를 찍은 것도 바로 복숭아 덕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들의 인연은 스탠리와 그의 가족이 결국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낸다.

스탠리의 감옥 탈출기, 고조할아버지 이야기, 케이트 바로우와 쌤의 러브 스토리. 이 세 개의 이야기가 같은 시간대에 다른 채널에서 하는 드라마처럼 함께 펼쳐진다. 동시에 100년이 넘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세 개의 드라마를 치밀하게 엮어냈다. 흥미진진함 속에 인종 문제, 불합리한 사회구조, 폭력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담아내서 책을 덮고도 한참을 생각하게 만든다.

페이스북은 자사의 네트워크를 분석한 결과 2016년 당시 전 세계 16억 명의 이용자들이 3.57단계를 거치면 모두 연결된다고 했다. 생각보다 훨씬 세상은 좁고 촘촘하다. 드라마처럼 대놓고 보여주지 않을 뿐이지 우리는 매일 수많은 우연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 속에서 인연이 만들어진다.

지금까지 나의 인연은 어떤 우연으로 이어져 왔을까. 그리고 지금 일상에서 마주치는 우연이 앞으로 어떤 인연으로 펼쳐질까. 내 삶을 써 내려가는 작가가 되어 100년 전의 인연으로 거슬러 올라가 공상의 나래를 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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