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장벽 주변에 밀집해 있는 동독주민들
화면캡처
분단 독일과 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1989년 11월 9일. 대부분의 혁명적 사건이 그렇듯 긴 배경에도 불구하고 직접적 단초는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 오랜 시간 쌓인 배경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때 가장 약한 간극이 순간적으로 터지면서 갑자기 모든 것을 바꾼다. 역사는 늘 그렇게 변해왔다.
패전이 갈라놓은 땅은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중간 지대 없이 도심 한복판을 뚝 자른 철책너머로 보이는 두 삶의 차이는 너무나 적나라했다. 동독의 젊은이들은 불과 몇 미터 앞 철책 너머에 펼쳐진 자유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동독 젊은이들의 목숨을 건 월경(越境)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공권력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급기야 1961년 동독 정부는 서쪽이 보이지 않도록 모든 철책을 콘크리트로 교체하기에 이르렀지만 국민들의 이성의 눈까지 가리지는 못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한 동독인들의 탈출이 이어졌고 민주화 시위도 점점 거세졌다.
때마침 1985년 이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로 변화를 추구하던 소련은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에 과거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있었다. 동독 정부는 자유를 갈망하는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기 시작했고 1989년 11월 9일 제한된 자유를 허용하겠다는 발표를 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마련했다.
"지금 바로"... 역사를 바꾼 그날
동독에 생중계되는 회견 자리에서 정부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는 베를린 장벽 지역을 포함 모든 국경 통과지점에서 국민들의 출국을 허용한다는 정부의 방침을 밝혔다. 이때 한 외신 기자가 묻는다. "법령이 언제부터 발효됩니까?(Wann tritt das in Kraft?)" 20세기 100년의 몇 손가락에 꼽힐 순간이었지만 질문 내용은 통상적이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독 정부 내 소통은 원활하지 않았고 대변인조차 정확한 사정을 인지하지 못했다. 기자의 질문에 큰 의미 없이 자료를 뒤적이던 샤보프스키 대변인이 내뱉은 말은 "제가 아는 한 이 법령은 즉시 발효됩니다(Das tritt nach meiner Kenntnis ist das sofort)".
그 순간만큼은 대변인도, 현장의 기자들도, 그 누구도 이 말이 앞으로 초래할 결과를 가늠할 수 없었다. 심지어 대변인은 건조한 톤으로 한 마디 더 보탠다. "지금 바로(unverzüglich)". 표정도 무미건조했다. 아마도 대변인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장의 기자들은 발언 내용을 전 세계로 긴급 타전했다.
'즉시'라는 부사로 하고 싶은 말이 '머지않은 시간 후'였을 수 있지만, 뒤따라온 '지금 바로'의 무게는 달랐다. 이 말을 들은 동독 시민들은 숨도 쉬지 않고 베를린 장벽으로 향했고, 감격에 겨워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통일을 향한 봇물은 그렇게 터졌다. 그리고 1년이 조금 못 되는 준비 기간 후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단 하나의 헌법만을 가지게 됐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오늘, 통일 후 출생한 독일인 비율이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한다. 분단의 원인이었던 전쟁을 겪은 독일인은 10% 남짓, 그리고 전쟁을 모른 채 분단의 비극을 살았던 60%가 현재 독일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통일 독일이 삶에 미친 영향을 직접 체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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