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빛 채색하기

눈에 보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검토 완료

홍윤정(arete)등록 2021.10.03 14:21
"검푸른 바다를 표현하고 싶은데...
파란 색과 갈색을 섞어보세요. 
이렇게요? 
좀 어둡게 표현하고 싶으면 짙은 갈색을 좀 더 섞고.
이렇게?
물을 섞어가며 색 농도를 조절하시고.
쉽지 않네요. 색이 따로 놀아요. 
아쉽네요. 그럴 땐 색이 마르기 전에 얼른 풀어줘야 하는데.
중간색을 덧칠할까요? 
아뇨." 

바닷물의 파란 색은 하나의 파란 색으로 칠할 수 없다. 자연은 한 색으로 존재하지 않기에, 채색할 때 그라데이션(점차적으로 색을 변화시키는 기법)을 하지 않으면 영 어색해보인다. 화실 선생님이 말했다. 잘못 칠했다 싶을 땐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아침 산책길에 낙엽 하나를 주웠다. 기온이 살짝 내려간 탓인지 나뭇잎에 붉은 색과 노란 색이 예쁘게 감돌았다. 나뭇잎을 보며 되새겼다. 한 색으로 칠하면 자연스럽지 않다. 아름답지도 않다. 

"붉은 색이 도는 부분을 빨간 색 하나로 표현하면 안되는 거, 아시죠?
네.
잘 보세요. 이 안에 어떤 색이 들어있는지. 
붉은 색과 검붉은 색 그리고....
파란 색과 갈색을 섞은 베이스에 붉은 색을 살짝 섞어보세요. 
네. 
어때요, 비슷한 색이 만들어졌나요? 
네. 
그럼 이제 붉은 색을 가감해 그라데이션을 해보세요. 
네.
물로 농도 조절하는 거 잊지 마시구요." 

 

가을 잎 수채화 ⓒ 홍윤정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대로 채색하기가 이리도 어려운 일이었나? 아무래도 그림엔 소질이 없는 모양이었다. 화실 선생님은 이 물감 저 물감을 섞어가며 '적당히' 농도를 조절하라는데 그 '적당히'가 대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어서 한숨만 나왔다. 

물리학 책을 뒤적거렸다. 빛에 대해 읽어보면 채색하는 데 도움이 될까 생각해서다.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무지갯빛으로 분리된다는 구절을 만났다. 고개를 끄덕였다. "빛은 물체에 닿으면 튕겨 나간다. 튕겨나온 빛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빛을 감지한 망막 세포가 뇌에서 전기신호를 발생시키면 우리는 보았다고 생각한다." 

"흰 빛은 여러 색의 빛이 모인 것이다. 모든 색을 가진 흰 빛이 물체에 닿아 특정한 색의 빛만을 반사시키면 그 물체는 특정한 색을 갖게 된다....." 계속해서 읽으면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아 이쯤에서 책을 덮었다.

인터넷에서 본 폴 세잔의 수채화 한 점이 뇌리에서 가시지 않았다. 숲 그림인데 노란 색에서 보라 색에 이르는 세분화된 빛 스펙트럼을 이용한 듯, 숲의 정경을 눈부시게 채색했다. 화려한 색채감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보기에 아름다웠다. 

 

숲 풍경 (Forest Landscape) pen and watercolor drawing, 1904, MoMA Private Collection ⓒ 폴 세잔 (Paul Cezanne)

 
다시 물리학 책을 펼쳤다. "소리와 마찬가지로 빛은 파동이다. 진동수에 따라 색도 달라진다. 너무 느리거나 빠르게 진동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처럼, 너무 느리거나 빠르게 진동하는 빛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시선을 멈추고 책을 덮었다.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세잔은 가시광선 말고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빛까지 칠한 게 아닐까? 그림에 보이는 저 보라 색 말이다. 아마도 자외선 아닐까. 대단한 발견이나 한 듯 나는 속으로 외쳤다. 

그림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니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가늘게 떨고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 공기 중을 부유하며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툭툭 건드리니 미세하게 분리된 색들이 사방으로 튀는 것 같았다.

분홍빛에 가까운 저 숨은 색을 보는 능력은 사물을 '잘 보는 일'에서 비롯하리라. 이 점에서 세잔은 아주 탁월했고, 그리하여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긴 화가가 됐으리라. 

채색하는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우선, 미세하게 분산된 색들을 잘 섞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빛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사물을 '잘 보는' 연습이 우선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눈이 아프도록 체험하다 보면 그라데이션 기술은 덤으로 따라오겠지. 확신이 생겼다. 다음 번엔 좀 더 잘 칠할 거라는.

"빛은 떨림이다. 빛은 전기장과 자기장이 시공간상에서 진동하는 것이다. 사람의 눈은 가시광선밖에 볼 수 없지만 우리 주위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빛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전자기장의 떨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세상은 볼 수 없는 떨림으로 가득하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있듯이, 보이지 않는 빛이 있다.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떨림과 울림> 김상욱 지음,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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