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평양을 방문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09.8.5
연합뉴스
국방장관이 백악관에 전쟁 시나리오를 보고하는 장면이 북한을 겁주기 위한 쇼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는 점은 핵 위기 종결 6개월 뒤에 나온 보도에서도 확인된다. 1995년 4월 14일 자 <경향신문> 1면 기사는 "미국은 지난해 5월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위기 때 영변 핵시설의 공습을 검토했으며, 이를 위해 모의 컴퓨터 실험까지 했다고 <워싱턴 포스트>지가 보도했다"고 전한다.
클린턴이 영변 핵시설 폭격까지 검토할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의 외교적 고립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가장 심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동맹국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김정일을 상대로 전쟁까지 계획했으니, 빌 클린턴만큼 북한 지도자를 강도 높게 압박한 미국 지도자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미·소 냉전구도를 만들어 한반도를 불행의 굴레로 몰아넣은 트루먼이나 '악의 축'과 '불량국가' 등을 운운하며 한반도 위기를 조성한 조지 부시(주니어)보다도 빌 클린턴이 가장 강력한 압박을 가했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전쟁 위기까지 치달았던 북·미 핵 대결은 1994년 9월 23일 개시된 제네바 협상이 10월 21일 마무리됨에 따라 전쟁 없이 봉합됐다. 북한은 NPT 복귀 및 IAEA 사찰 수용에 더해 핵개발 동결을 받아들이고 미국은 경수로 원자로 2기와 중유를 제공하는 한편, 양국 모두 관계정상화를 추구하기로 약속하는 선에서 이 일은 마무리됐다.
대외관계 복원
김정일은 핵위기 때 클린턴이 보여준 자신감이 어느 정도는 북한 동맹관계의 약화에 기인했음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그 뒤에 그가 보여준 노력에서 알 수 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그는 고강도 자력갱생을 통해 내부 안정을 도모하는 것에 더해, 중국·러시아와의 관계 복원에도 보통 이상의 심혈을 기울였다. 아버지 삼년상을 끝내고 1998년 9월 5일 개헌을 통해 권력을 안정화시킨 그는 1999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중국 방문 및 2000년 그 자신의 비공식 중국 방문, 1999년 북·러 우호선린협조조약 체결 및 2000년 북·러 공동선언 등을 통해 중국·러시아와의 관계를 상당 수준으로 복원시켰다.
물론 냉전 시절의 동맹관계에는 근접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3국들이 볼 때 '북한이 곤경에 처하면 저 나라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겠구나'라고 생각하게 할 정도에는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은 중·러 이외의 국가들에도 신경을 썼다. 친미 진영인 유럽에도 공을 많이 들였다. 일례로 1998년 12월 2일에는 유럽연합과 정치 대화를 갖게 됐고, 2000년 1월 4일에는 이탈리아와 수교를 했고, 2001년 2월 6일에는 캐나다와 수교를 했다. 이 외에도 많은 나라들이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클린턴과의 핵 대결 때 약점이 됐던 것을 클린턴의 제2기 임기가 끝나갈 즈음에 어느 정도 해결했던 것이다.
김정일이 2002년 10월 이후의 제2차 핵위기 때 조지 부시의 압박을 상대적으로 덜 받은 것, 아들 김정은이 오바마·트럼프와의 대결 때 비교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김정일이 2000년을 전후한 시점까지 전통적 동맹관계를 어느 정도 회복해 놓은 데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자체 역량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겠지만, 탈냉전으로 사라지는 듯했던 중국·러시아와의 우호관계를 어느 정도 복원해놓은 것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 와중에도 대외관계 복원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내부 사정이 극도로 악화되면 대외관계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질 만도 한데, 그 와중에도 동맹 복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라이벌 클린턴이 그렇게 하라고 그에게 가르쳐준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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