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굽는 컴퓨터

일을 통해 세상과 연결하기

검토 완료

홍윤정(arete)등록 2021.09.10 13:41
"물론 돈도 중요하지만,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을 하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배우고, 세상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 
(빵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얼마 전 동네 미용실이 문을 닫았다. 지나가다 미용실 유리창에 '임대' 표지가 붙여진 걸 보았는데, 며칠 후 임대 표지가 사라지고 내부공사가 한창이더니 지금은 말끔하게 단장하고 새 입주인을 기다리는 중이다.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이 구슬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 미용실 주인은 가게를 접고 다른 곳으로 이사했을까. 아니면 미용 일을 때려치고 아예 다른 업종으로 갈아탔을까. 남의 일에 참견할 형편도 아닌 내가 하릴없이 미용실 주인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건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손님은 없고 주인 혼자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던 모습이 생각나서다. 

수많은 사람이 사업을 정리하고 폐업하는 과정을 경험한다. 산에 오르면 다음에는 내려가야하는 것처럼, 모든 사업은 흥하면 반드시 쇠하는 과정을 밟는다.

30년 이상을 이어온 법률사무소가 지난 봄 문을 닫았다. 그 과정을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제일 먼저 컴퓨터 등 사무기기를 무료로 수거해가는 곳을 알아내 연락했더니 다음 날 60대 남성 한 분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컴퓨터 20대, 모니터 16대, 소형 레이저 프린터기 10대, 냉장고 1대, 전자렌지 1대, 공기청정기 2대, 히터 7대, 선풍기 10대를 이틀에 걸쳐 실어날랐다. 은퇴후 마냥 놀 수가 없어 소일거리로 이 일을 하게됐다며 벌이가 꽤 괜찮다고 했다. 오피스가 많은 이 지역에서는 전자제품 수거 건이 수시로 있기 때문이다. 물건을 다 옮긴 그는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내밀며 이거라도 드리겠다고 말했다. 아니라고, 도로 넣으시라고 고개를 흔들며 만류했지만, 돈을 책상위에 올려놓고는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다음으로 책상과 의자, 책장, 금고, 프로젝터, 사무용 복합기 2대를 처분할 일이 남았다. 사무용 복합기는 구입업체에서 무료로 수거해가기로 했다. 문제는 20대가 넘는 사무용 책상과 회전의자, 서류장과 빽빽이 꽂힌 서류철, 칸막이 등을 비롯한 잡동사니를 어떻게 처분하느냐였다. 궁리끝에 한 업체와 연락이 닿았다. 사무실을 둘러 본 직원은 모두 싹 치워주는 비용으로 이백오십만 원을 요구했다. 협상해서 이백만으로 결정했다.  

30년 이상 지탱해온 법률사무소를 정리하는 데 딱 3주일이 걸렸다. 사무실을 떠나는 날 대표 변호사는 부동산 중개소에서 매수인과 만나 사무실을 양도하는 계약서에 날인하고 밖으로 나와 건물 주변을 잠시 둘러보고는 차에 올랐다. 30년 전 개업할 때 제작한 길다란 자개 명패와 작은 화분 한 개가 뒷자석을 차지했다. 

나는 집에서 하루종일 컴퓨터앞에 앉아 자료를 확인하고 문서를 작성해 기관에 전자문서로 제출하는 일을 한다. 참으로 재미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컴퓨터와 씨름함으로써 소소하나마 금전적 보상을 받는다. 그 수입으로 평소에 눈여겨둔 옷을 사기도 하고 화방에 가서 그림도구를 구입하며 가끔은 근사한 곳에 가서 외식도 한다. 

금전적 보상 외에도 컴퓨터가 내게 준 게 또 하나 있다. 자존감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지겨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한다. 그 어쭙잖은 자존심이 나를 살아가게 만든다. 하여, 쥐꼬리만 한 월급에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오래 지속되면 좋겠다. 

오늘 보니 새로 단장된 미용실 자리에 가구가 들여졌다. 8인용 테이블과 흰색 의자 8개, 밤색 책꽂이 3개가 창가에 놓여진 걸 보니 아마도 초등생들을 가르치는 보습학원 쯤이 될 성 싶다. 얼마나 지속될 지 모르겠으나, 그 동안에는 여러 사람이 그곳을 오가며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를. 
 
 

빵굽는 컴퓨터 스케치 ⓒ 홍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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