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김종성
왕의 궁궐을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을 천도라고 불렀다. 정조가 재위 중에 화성으로 궁을 옮겼다면 명확하게 천도를 계획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아들에게 넘겨주고 상왕이 된 뒤에 화성으로 가고자 했다. 상왕도 왕이었지만 금상(今上)은 아니었기 때문에 현직 주상이 아닌 상왕의 궁궐을 옮기는 것을 일반적 의미의 천도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인 연령보다 세 살 적은 만 14세 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면, 아버지인 상왕이 여전히 실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조가 한창 개혁을 추진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1804년 이후에도 정조가 계속해서 실질적 군주로 인식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의 1804년 구상이 실현됐다면 완전한 의미의 천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천도의 의미를 띠게 됐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종시 행정수도 완성으로 인해 세종시와 서울시가 수도 기능을 분점하게 되는 것처럼, 정조의 계획이 현실화됐다면 화성과 한양이 도읍 기능을 분점하는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화성 신도시에 담긴 정치 공학
그런데 정조의 구상 속에는 심상치 않은 면이 담겨 있었다. 수원 화성으로 상왕의 궁궐을 옮겨놓고 국정을 일신한 상태에서 사도세자 복권 사업을 완성하려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로지 아버지의 복권만을 위해 궁궐 이전을 추진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왕조 시대의 천도는 흔히 기존 도읍에 포진한 기득권 세력을 약화시키거나 그들로부터 빠져나와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단행됐다(A). 또는 경제적·군사적 거점을 다른 데로 옮겨 국가경쟁력을 강화할 목적으로도 단행됐다(B). 고려왕조의 법령에 따라 개경에서 고려 군주로 즉위한 이성계가 한양(공식 명칭은 한성)으로 천도한 것은 A 때문이고, 고구려 장수태왕(장수왕)이 만주 국내성에서 한반도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B 때문이었다.
정조의 화성 이전은 A에 가까웠다. 한양에 자가주택 혹은 임차주택을 보유한 상태에서 기득권을 행사해온 정치세력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이자 자신과 할아버지 영조의 숙원인 탕평 정치를 완성하자면, 자신이 마음 놓고 '활보'할 수 있는 근거지가 필요했다. 탕평은 제1당의 단독 집권을 막는 것이었으므로, 탕평을 완성하자면 제1당의 세력권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정조의 화성 이전은 A에 근접했지만, 이 잣대만으로는 온전히 해석되지 않는 측면도 있다. 왕권강화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혁신을 도모하려 했던 게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를 주도한 세력은 본인 혹은 문중이 수십에서 수천 명의 노비를 동원해 토지를 경작하면서 공식적으로는 선비 혹은 관료로 활동하는 지주계급이었다. 일반적으로, A 유형을 계획하는 군주들은 이 계급 내에서 동조자들을 찾아내 천도에 필요한 인적 역량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런데 정조는 지주계급 사대부들 속에서 동조자를 찾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부르주아 계급'에서도 협력자들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한 상인 계층 속에서 새로운 기반을 끌어내고 이들과 함께 화성 이전을 완성하고자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