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어전회의 장소 복원품. 충남 부여시의 백제문화단지에서 촬영.
김종성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백제 왕족 출신인 성충은 641년 의자왕 즉위 뒤에 정권 핵심부로 발탁됐다. 이때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대야성 침공이다. 이 전투로 인해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목숨을 잃고 김춘추가 동맹 외교에 뛰어들게 됐으니, 부여성충과 김춘추의 악연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로 그 부여성충이 김춘추의 평양 방문 때 그곳에 함께 있었다고 <조선상고사>는 말한다. 김춘추가 나여동맹을 체결하고자 평양에 갔을 때, 부여성충은 여제동맹을 체결하고자 의자왕의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갔던 것이다.
부여성충과 연개소문의 협상은 순조로웠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협상 타결을 낙관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때 갑작스레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조선상고사>는 "동맹조약이 거의 성사될 단계에 접어들 때였다"면서 "갑자기 연개소문이 성충을 멀리하고 몇 달 동안 만나주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이상하게 여긴 성충이 탐지해보니, 신라 사신 김춘추가 와서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을 방해하고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고 신채호는 썼다.
김춘추는 배짱도 좋고 언변도 좋았지만, 외모로도 관심을 끌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를 잡아가둔 왜국인들도 '용모와 얼굴이 아름답다'고 평가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당태종 역시 호감을 표시했다. 당나라인들과 일본인들의 반응을 보면, 연개소문을 비롯한 고구려인들 역시 좋은 인상을 받았을 수도 있다. 이것이 협상에 긍정적 효과를 미쳤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