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의 무덤인 영릉(寧陵). 녕릉으로도 표기된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다.
김종성
효종은 정통성이 약한 군주였다. 형인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와 갈등을 겪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데 이어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적절한 명분도 없이 배척을 당한 뒤에 인조의 후계자가 됐다.
정통성을 갖춘 소현세자와 그 아들들이 연달아 배제된 상태에서 1649년에 군주가 됐기 때문에, 효종은 콤플렉스를 안고 국정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가 1623년 광해군 실각 이래 26년째 장기 집권 중인 서인당에 끌려다니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안 그래도 양반 기득권층이 더 강력한 상황에서, 군주의 정통성이 약하면 일반 대중의 처지도 함께 열악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조세 정책이나 노비 정책에도 기득권층의 입장이 더 많이 투영될 소지가 있었다.
이런 구도를 뒤집고자 효종이 전개한 유명한 정책이 중앙군 확충이다.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추진한 이 정책의 숨은 취지는 왕권 강화였다.
국가가 보유한 공노비와 지주들이 보유한 사노비 중에서 훨씬 힘든 쪽은 사노비였다. 실학자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사천(私賤, 사노비)만큼 불쌍한 것도 없다"고 말했다. 이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국가에 예속된 사람들보다는 양반 귀족들에게 예속된 사람들이 훨씬 힘든 삶을 영위했다.
군주가 중앙군을 확충해 군인의 수를 늘리게 되면 사노비 속의 장정 비율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일반 백성이 나랏일을 한다고 해서 부유해지거나 출세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런 일을 하는 백성의 숫자가 늘어나면 대중에 대한 양반 귀족들의 영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왕조시대의 '큰 정부'는 백성에 대한 복지 지출을 늘리지는 못해도, 적어도 양반 귀족들의 대중 지배력을 떨어트릴 수는 있었다. 효종의 중앙군 확충 정책은 그의 왕권을 강화하는 측면과 더불어 사노비의 숫자를 줄일 수 있었다.
효종의 군비 확충 정책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뒀다. 주상 경호부대인 금군을 확대하고 중앙군 조직을 부분적으로 개편하는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인 면에서는 실패였다. 중앙군의 일원인 어영청과 훈련도감을 확충하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가 실패한 것은 조세 증가와 왕권 강화를 꺼려하는 서인들의 반발이 드셌기 때문이고, 송시열이 그 선두에서 임금을 강하게 압박했기 때문이다.
이조판서 송시열 및 서인들과의 대결에 부담을 느낀 효종은 죽기 2개월여 전에 비장의 한 수를 꺼내 들었다. '여야 영수회담'을 추진한 것이다. 스승이기도 한 송시열과의 독대를 통해 군비 강화를 관철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에 따라 창덕궁 희정당에서 독대가 이뤄진 날이 1659년 4월 2일(음력 3월 11일)이다.
"신을 너무 모르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