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相生)의 역사학은 가능할까?

검토 완료

김해규(kimsea6)등록 2021.07.28 13:48
                              상생(相生)의 역사학은 가능할까?
 
역사학은 '과거(過去)'를 대상으로 한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되새겨 해석하고 교훈을 얻는 학문이 역사학이다. 역사학에서는 객관성(客觀性)을 중시한다. 하지만 역사가마다 역사관(歷史觀)이 다르기 때문에 객관성의 문제는 자칫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내 주장, 내 의견인데 당신이 뭐라 할 수 있는가?'라는 반론을 펼치는 사람들의 의중에는 다분히 자의적 요소가 숨겨 있다.
그러면 '역사적 객관성'의 기준은 무엇인가? 첫째, '근거가 있는가?'라는 문제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자의적으로 평가해버리면 의도적이지 않게 상대방을 폄훼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역사학도 마찬가지다. 근거를 갖고 논리적, 객관적으로 평가해야만 최소한의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다. 사료비판도 중요하다. 역사학에서는 역사적 근거자료를 '사료(史料)'라고 한다. 역사적 사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밝혀내려면 다양하고 풍부한 사료를 수집·정리하고 냉철하게 비판해서 서술해야 한다. 둘째, 평가기준의 문제다. 학문이라는 것이 개인의 관점(觀點)과 주장을 존중하지만 한편으로 그렇게 주장된 내용은 누군가에 의해 또 다시 평가되고 비판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주장을 긍정적으로 평가받으려면 역사관(歷史觀)이 명징(明澄)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타당성을 인정받고 공감 받을 수 있다. 셋째, 상생(相生)의 역사학이 되어야 한다. 근래 지방자치단체들을 중심으로 지역적 이기주의에 편승한 주장들이 종종 발생한다. 역사적 근거자료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지 아니면 특정 개인의 자의적 주장이었는지도 따져보지 않고 과거 기록의 존재 유무만으로 객관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역사학은 상생(相生)의 관점을 잃어버릴 때 '폭력적'이 된다. 19세기 말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이 역사학을 자의적, 이기적으로 해석하여 침략의 이론적 도구로 사용했던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토요일 진위면의 '암행어사 박문수 문화관'에 가서 역사 강의를 했다. '암행어사 박문수의 충절과 위민정신을 본받자'는 취지의 단체다. 근래 원주 원씨 종중의 요청으로 '의병장 원연' 전기를 저술하고 있다. 그 인연 때문에 원씨 종중으로부터 강의요청을 받고 강사로 참가하게 됐다. 원균(元均)은 역사적으로 가장 억울한 인물이다. 당대와 후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은 명장이었지만 일제강점기와 박정희정권을 거치며 폄훼되어 이제는 '원균은 명장이다'라는 주장 자체가 심각하게 공격받는 처지가 되었다. 사실 『선조실록』만 찬찬히 살펴봐도 원균의 역사적 가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이순신이 대단한 장수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23전 23승은 이순신의 능력과 힘만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당시 조정에서도 원균의 돌격전술(당파작전)과 학익진으로 대표되는 이순신의 수비전술이 협력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는 것이 대다수 대신들의 공론(公論)이었다. 실록은 이순신도 인격적으로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개인의 감정을 내세우고 타인을 헐뜯기도 했던 사람이라는 사실도 말해준다. 이순신의 백의종군, 원균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도 타당한 이유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제3공화국 시절 소설과 영화, 만화로 각색된 성웅 이순신의 이미지, 졸장부 원균의 이미지는 너무도 깊게 우리 국민들의 뇌리에 박혀버렸다. 아무리 객관적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이제 원균은 일본제국주의와 독재 권력에 의해 희생된 비운의 명장이 되어버렸다.
얼마 전 평택시 주최 '평택강 선포식'이 대대적으로 개최됐다. 지역의 유수한 언론에서는 그 사실을 비판하는 기사를 1면 톱으로 내기도 했다. 사실 '평택강 선포식'은 평택시의 얇은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해프닝이다. 조선시대 하천은 통합적으로 관리되지 않았다. 하천의 명칭도 구간마다, 지역마다 다르게 불렀다. 안성천만 해도 안성지역에서는 '남천', '웅천강'으로 불렀다. 성환 경계에서는 홍경천이라는 이름이었고, 평택구간에서는 한내, 대천, 한천으로 불렀다. 진위천은 '장호천'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삼남대로가 지나는 진위면 신리에는 '장호원'이라는 역원이 설치되었으며 그 주변의 들판을 '장호들'이라고 불렀는데, 진위천이 장호들을 가로질렀기 때문이다. 이것이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안성천과 진위천으로 정리됐다. 하천구간의 대표적인 행정구역 명칭을 붙인 것인데, 일제식민지배와 식량증산을 위한 종합적 하천관리를 위해서도 명칭정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평택시와 일부 인사들은 평택평야를 가로지른 하천 명칭이 '안성천'인 것이 못마땅했던 것 같다. 과거 아산만 방조제가 준공되고 아산호가 조성되자 굳이 '평택호방조제', '평택호'라고 바꿔 불렀던 것과 정서상 비슷한 역사의식이다.
근대 이전의 하천은 조운과 어업, 수로교통에도 활용됐지만 무엇보다 지역과 지역의 경계(境界)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서 고을은 산을 넘지 못하고 강을 건너지 못했던 것과 일치한다. 평택지역도 1914년 이전까지만 해도 안성천 남쪽(팽성읍)은 충청남도에 속했다. 어느 시인묵객이 '평택강'이라고 표현한 것도 따지고 보면 '평택현(팽성읍) 앞으로 흐르는 강'이라는 의미였다. 다분히 문학적이고 시적인 표현을 두고 본래부터 '평택강'이라고 불렀다는 듯이 주장하는 것은 객관적이지 못하다. 더구나 특정 사회단체나 개인이 아니라 평택시라는 지방자치단체가 학문적 검토도 없이 선포식을 갖고 퍼포먼스를 하는 것은 지극히 넌센스다.
역사적 주장은 객관적일 때 공감과 지지를 얻을 수 있다. 나와 우리만의 이익이 아니라 주변 자치단체의 역사와 삶을 두루 살피며 상생(相生)을 도모한다면 '멋짐'으로 발현될 수 있다. 도시가 성장하면서 힘이 생겼다고 주변 도시들을 억압하거나 이기적 주장만 해서는 '멋짐'과 '품격'이 높아질 수 없다. '억압'과 '이기심'은 제국주의의 속성이다. 소설가라고 해도 '소설적 상상력'만으로 특정 개인을 함부로 희화화하거나 폄훼하는 것도 폭력이다. 평택시는 인구 54만의 중급도시로 성장했다. 앞으로 100만 이상은 무난할 것 같다. 성장만큼 품격도 높이자. 그래야 졸부도시, 제국주의적 도시라는 오명에서 벗어난다.(2021.07.11.)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