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미리스의 전설(2019)

- 강자(强者)의 역사만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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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규(kimsea6)등록 2021.07.28 15:41
                                         타미리스의 전설(2019)
                                   - 강자(强者)의 역사만 있는 게 아니다
 
베트남인들은 '사과할 줄 모른다'고 말한다. 자존심이 강해서 잘못을 해도 좀처럼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내가 운영하는 가게에도 베트남 학생 세 명이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들은 내가 봐도 자존심이 강하고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권력과 돈 앞에서도 당당하려 노력한다. 반대로 같은 편이라고 신뢰하면 어지간해서는 배신하지 않는다.
쩐흥다오(1228~1300)는 베트남의 국민적 영웅이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이순신장군과 동급이다. 쩐흥다오(陳興道)는 세조 쿠빌라이 시절 세 차례에 걸친 원나라의 침략을 모두 물리쳤다. 1257년 1차 침입 때 몽고군은 쩐흥다오가 굳게 지킨 베트남 북방을 넘어 서지 못했다. 하지만 2차 침입 때는 사정이 달랐다. 작심을 하고 침략한 몽고군은 수도 탕롱(하노이)를 함락시키며 굴복을 강요했다. 원나라는 투항에는 관대했지만 저항은 철저히 응징했기 때문에 왕과 신하들은 벌벌 떨며 항복하려고 했다. 그 때 쩐흥다오가 나섰다. 애국심에 불탔던 쩐흥다오는 격장사문(檄將士文)을 써서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위급한 나라를 구하자고 호소했다. 쩐흥다오의 애국심과 진정성에 감동한 베트남 병사들은 격전 끝에 몽고군을 물리쳤다. 베트남은 원나라의 3차 침입을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바익당강(홍하)에 말뚝을 박아 적이 쉽게 건너지 못하도록 했으며 병장기를 마련하고 군사들을 조련했다. 1287년 몽고가 3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쩐흥다오는 만조(滿潮)를 이용하여 원나라군을 강의 상류로 유인하고 간조(干潮) 때 공격하여 대승을 거뒀다. 또 적은 군사로 초토전술과 게릴라전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적을 괴롭혔다. 전쟁의 승리로 베트남은 자주권을 지켜낼 수 있었고 쩐흥다오는 대왕에 봉해졌다. 백성들은 지금까지 쩐흥다오를 신(神)으로 숭배한다.
중앙아시아에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가 있다. 카스피해 동쪽에서 몽골 서쪽 경계까지 넓은 영토를 가진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큰 국가이다. 영토는 넓지만 인구는 18,994,958명(세계 64위)에 불과하다. 일부는 상공업에 종사하지만 국민들 대부분이 유목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은 일찍부터 이슬람교를 수용했다. 나라 이름에 '탄'자가 들어간 것도 '술탄의 나라', 다시 말해서 이슬람국가라는 의미다. 카자흐스탄은 전 인구의 70% 이상이 수니파 이슬람교도다. 나머지는 그리스정교와 개신교지만 종교적 갈등이나 분쟁은 거의 없다.
카자흐스탄은 일명 초원길이라고 부르는 실크로드의 중간쯤에 위치했다. 그래서 민족이동이나 국가의 흥망성쇠가 빈번했다. 기원전에는 페르시아문화권에 속했고 그리스나 스키타이문화도 영향을 끼쳤다. 고대로부터 동서문화교류의 매개역할을 했던 것도 초원길이었다. 그러다보니 문화가 복합적이다. 기원 후 초원길의 패자는 튀르크계의 흉노족이었다. 흉노족은 기원 전 진·한제국의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들은 로마제국 말기 중앙아시아 동쪽과 동유럽 방면으로 이동해서도 강한 힘을 발휘했다. 11세기 전후에는 코레즘왕국이 카스피해와 아랄해 동쪽, 이란고원 일대를 지배했다. 원나라가 세웠던 킵차크한국 이후에는 티무르제국이 번영했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카자흐스탄은 영화와는 거리가 먼 국가처럼 느껴진다. 필자도 지금까지 카자흐스탄 영화를 봤던 기억이 없다. 칸영화제나 베를린영화제에서 중앙아시아 계통의 영화가 상을 받았다는 소식도 들어보지 못했다. 역사적 영웅이 누구인지, 특산품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카자흐스탄에서 무려 500억 짜리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의 제목은 '타미리스의 전설(2019)'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타미리스가 카자흐스탄의 신화 속 주인공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역사적 인물이다. 다시 말해서 초원길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영국의 넬슨제독, 베트남의 쩐흥다오만큼이나 유명한 여전사였다.
타미리스는 기원전 중앙아시아의 마사게타이족 여왕이었다. 청동기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던 중앙아시아는 일부 부족들만 교역을 통해 번영했을 뿐 대부분은 유목과 농경, 약탈경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초원의 질서를 유지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이들에게 서쪽으로부터 무시무시한 세력이 압박해왔다. 그 이름도 유명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였다. 페르시아에는 전설적인 군주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군주는 키루스2세라는 사람이다.
키루스 2세는(BC 559∼529)는 진정한 페르시아의 건설자로 추앙받는다. 페르시아 역사에서 키루스 1세가 페르시아를 통합한 왕이라면 그 아들 캄비세스는 혼인정책을 통해 페르시아와 메디아를 통합한 왕으로 기억된다. 캄비세스의 아들 키루스 2세는 광개토대왕 같은 정복군주였다. 그는 중동의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리던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타나와 리디아까지 정복했으며,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도시와 카르디아의 수도 바벨론을 점령하여 중동과 소아시아일대를 통일했다. 키루스 2세는 점령지역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는 융화정책을 폈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종교적 자유를 허락한 사람도 키루스 2세다.
어마무시 했던 키루스 2세가 이집트와 중앙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사신을 파견하여 회유와 협박을 한 것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타미리스의 남편과 아들을 바벨론으로 초대하여 페르시아라는 대국의 위용으로 기를 죽이려던 노력이 실패하자 죽여 버린 것은 압박과 선전포고였다. 그래도 굴복하지 않자 스스로 대군(大軍)을 이끌고 중앙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그랬으면 중앙아시아는 끝장난 거나 다름없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키루스 2세 아닌가. 전력상 마땅히 그랬어야 하는데 역사(歷史)에는 '키루스 2세가 중앙아시아 원정에서 전사했다'고 기록했다. 침략자의 입장에서 기록했으니 '전사(戰死)'라고 했지 중앙아시아 쪽에서 서술했으면 '죽였다'라고 했을 것이다. 키루스 2세의 전사 소식을 후대에 전한 역사가는 다름 아닌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투스다. 헤로도투스는 '기원전 530년 중앙아시아의 마사게타이(Massagetae)족 여왕이 아라크스(Araks)강 북안에서 페르시아 원정군을 격퇴하고 키루스2세를 죽였다'고 기록했다. 마사게타이족 여왕은 다름 아닌 타미리스다. 천지가 격동할 일이다.
그러면 마사게타이족은 누구인가? 동서문화교류 연구의 대가(大家) 정수일 교수는 기원전 7~4세기경 카스피해 동북 해안에서 아랄해, 시르다리야강 하류지역에 살았던 유목민들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문명사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중앙아시아의 일개 유목민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발톱의 때만큼도 안 되었던 유목민족의 여왕이 페르시아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왕까지 죽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며,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수군을 괴멸시킨 이순신의 명량대첩이고, 쩐흥다오의 홍하대첩이다. 또 로마제국 최강의 9군단을 전멸시킨 브리튼 원정과, 아우구스투스황제 시절 로마제국 3개 군단이 전멸당한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 비견될만한 사건이다.
이처럼 역사에 기억될만한 위대한 전투였지만 마사게타이족의 '아라크스강 전투'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특정 민족의 위대한 역사가 후대에 널리 알려지지 않는 이유는 자명하다. 가장 큰 이유로는 페르시아는 문명대국이었지만 유목민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고, 마사게타이족 후손들이 대제국을 건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명대국은 문자로 자신들의 입장에서 기록을 남겼지만 문자가 없었던 유목민들은 구술로 역사를 전승했을 뿐이다. 만약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마저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역사 속에 영영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초원의 삶은 거칠고 투박하다. 끊임없이 이동생활을 하기 때문에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정주국가를 이루기도 힘들다. 땅에 정주하지 않으면 화려한 왕궁건축과 복잡한 문자도 필요 없다. 비싸고 예쁜 그릇도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그러다보면 위대한 건축물도 기록문화도 발전할 수 없다. 마사게타이족과 타미리스의 삶도 다를 바 없었다. 하천 변에 자리 잡은 그의 부족은 농경과 약탈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어머니는 타미리스를 낳다 죽었는데 그것은 고대 초원지대의 삶에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부족장이었던 아버지는 위대한 전사였다. 초원지대에서 '위대함'은 전쟁과 사냥, 약탈을 잘하는, 그래서 부족을 배불리 먹이고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힘쎈 남자를 의미했다. 타미리스의 삶은 아버지가 부하들에게 암살당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천신만고 끝에 악마의 숲으로 숨어들었지만 발각되어 타미리스를 제외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그도 큰 부상을 당했다. 고대 초원지대에서 부족(部族)으로부터 떨궈진 사람은 무리를 벗어난 늑대와 같다. 생존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고 미래도 불투명하다. 끈 떨어진 연처럼 대지를 팔랑거리던 타미리스의 미래는 우연히 조우한 이웃부족의 자비으로 수렁에서 건져졌다. 그리고 전사로 성장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부족도 되찾았다. 훌륭한 남자와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았다. 마냥 행복할 것 같았던 삶에 위기를 가져다 준 것은 강대국 페르시아였다. 타미리스가 남편과 아들이 죽고 페르시아가 침략하는 상황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의 강한 연단과 초원에서 길러진 불굴의 정신 때문이었다.
 
전설로만 남았을 타미리스의 위대한 승리가 영화화 될 수 있었던 것은 '카자흐스탄'이라는 유목국가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했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의 입장에서 선조들의 과거 위대한 역사는 민족적 정체성과 자긍심을 고취하는데 매우 유용했을 것이다. '타미리스의 전설'은 자유와 평화는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가르쳐준다. 부요함은 굴종을 통해 쉽게 얻어지지만, 민족의 자주권은 투쟁을 통해 지켜진다는 사실도 알게 한다. 이 영화는 특정 배우의 열연이 빛나지도 허리우드 영화처럼 영화기법이나 기술이 특출 나지도 않는다. 스토리전개도 소박하고 투박하다. 하지만 진정성만큼은 어느 영화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다. 허리우드영화처럼 화려한 액션과 조명, 컴퓨터 그래픽만이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공식을 거부한다. 위선으로 가득 찬 세련된 아름다움보다 소박한 멋짐이 무엇인지도 가르쳐준다. 강자만이 훌륭한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새삼 일깨워준다.(202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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