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시대 삼복더위 피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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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정(arete)등록 2021.07.26 10:24
 

나폴리의 벽 (A Wall in Naples) 유화, 런던내셔널갤러리 소장 ⓒ 토마스 존스(1742~1803)

   
이백 오십년 전, 영국 풍경화가 토마스 존스(Thomas Jones, 1742~1803)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관습을 무시한 그림을 시도했다. 나폴리 숙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화폭에 담았다. 보잘 것 없는 창문과 밋밋한회색 벽 그리고 손바닥만한 하늘을 담은 이 그림은 20세기 중반까지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하다 최근들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현대예술에는 종류도 다양하고 주장하는 바도 무성해서 지금이라면 별로 이상할 것 없는 이 그림은 이백 오십년 전엔 그림축에도 끼지 못했던 것이다. 화가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문득 내 어린 시절 장독대가 놓인 작은 화단옆에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들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니 담장 너머로 플라타너스의 벌레먹은 이파리들이 한여름 땡볕에 미동도 않고 가지에 매달려있던 모습이 생각난다. 진녹색의 송충이들이 장독대 위로 툭툭 떨어지던 모습도. 여름날 오후 혼자 방에 누워 천장에 발린 벽지의 기하학적인 무늬를 하릴없이 눈으로 쫓다 잠들던 기억도. 

하루종일 온 도시가 떠나갈 정도로 매미들이 맹렬히 울어대고, 폭염주의보가 휴대폰을 통해 연일 띵동거리며 울려댄다. 집에서 오규원의 시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를 읽는다. 시를 읽는 동안 잠시나마 더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마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한 장소로 돌아가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시 한 줄 한 줄 음미하며 읽어본다.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  오규원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플라타너스가 쉰일곱 그루, 빌딩의 창문이 칠백열아홉, 여관이 넷, 여인숙이 둘, 햇빛에는 모두 반짝입니다. 

대방동의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양념통닭집이 다섯, 호프집이 넷, 왕족발집이 셋, 개소주집이 둘, 레스토랑이 셋, 카페가 넷, 자동판매기가 넷, 복권 판매소가 한군데 있습니다. 마땅히 보신탕집이 둘 있습니다. 비가 오면 모두 비에 젖습니다. 산부인과가 둘, 치과가 셋, 이발소가 넷, 미장원이 여섯, 모두 선팅을 해 비가 와도 반짝입니다.

빨간 우체통이 둘, 학교 담장 밑에 버려진 자전거가 한 대, 동작구 소속 노란 소형 청소차가 둘, 영화 포스터가 불법으로 부착된 벽이 셋, 비디오 가게가 여섯, 골목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 전당포 안내 표지판과 장의사 하나, 보도블럭 위에 방치된 하수도 공사용 대형 원통 시멘트관 쉰여섯이 눈을 뜨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 ↓↓표 가변 차선 표시등 하나도!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한 줄에 아홉 개씩 마름모 꼴로 놓인 보도블럭이 구천오백네 개, 그 가운데 깨어진 것이 하나, 둘……여섯……열다섯……스물아홉……마흔둘…… "

시인은 어디에서 이런 시를 썼올까. 궁금하다. 동네 구석진 곳에 앉아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써내려갔을까. 아니면 이층 방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동네 상가들을 하나씩 응시하며 썼을까. 

햇빛을 받아 아름다운 것들은 시인이 쓴 것 말고도 많다. 반짝이는 아침 햇살, 갓 캐어낸 감자의 축축한 습기, 비에 젖은 벤치, 한여름에 경험하는 이런 순간들은 하나같이 덧없고 찰나적이다. 러시아 속담에 '생각이란 빈대처럼 많아 헤아릴 수가 없다'는 말이 있다. 나도 그렇다. 벽을 보다 어린 시절을 연상하고 하늘을 보다가 반짝이는 것들을 생각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이리저리 가로센다.  

폭염과 코로나때문에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요즘, 상자곽같은 답답한 공간속에서 슬기롭게 시간을 보낼 방법은 없을까.

윌리엄 워즈워드의 소네트 시 한 편은 이런 말로 시작한다. "수녀들은 기도하는 방이 좁은 것을 불평하지않고; 은둔자는기거하는 방이 작은 것에도 만족하며; 학생들은 감옥같은 성채에 불만을 품지않고 공부하며 사색한다;……" 비좁은 공간을 나열하며 감옥같은 삭막한 공간에서도 인간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라고 워즈워드는 이야기한다. 

독일어 단어에 '치타델레(Zitadelle)'가 있다. 다른 사람이 함부로 침입할 수 없는 견고한 공간을 말한다. 그런 공간이 있는 한, 한여름 열대야로 잠 못이룬다 해서 투덜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름더위를 피할 수 있는 나만의 피난처, 나아가 생각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이런 공간이 나에게도 있다면, 몸이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한다해서 답답해 할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동네 담장 수채화 ⓒ 홍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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