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다룬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
플라톤에게 진리와 말솜씨의 관계는 운동, 좋은 음식과 화장술의 관계와 같았다.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비결은 꾸준한 운동과 좋은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다. 화려한 화장술은 건강해 보이게 할 수 있지만 실제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말솜씨도 진리처럼 보이게 할 수는 있지만 실제 진리로 이끌어주지는 않는다.
플라톤은 진실을 은폐하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말재주를 퇴출시키는 일에 전력을 다했고 실제 그의 바람대로 평생의 라이벌 수사가들을 역사의 무대 전면에서 퇴출시켰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다시 학문적 정제와 정립을 통한 일부 복권은 됐지만 수사법, 수사학으로 표현되는 말의 재주는 이후 인류의 사상사에서 거의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신수사학'이라는 이름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소중히 생각했던 표현의 권리를 복원시키려는 움직임들이 프랑스, 벨기에 등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표현의 권리를 복원하려는 이들은 민주주의 원리가 살아 움직이고 표현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일수록 수사학이 부활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플라톤의 무시무시한 학문적 카리스마는 혹여 있을 수 있는 결점에 대한 포용을 용인하지 않았다. 만약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현실을 버려야 했다. 심지어 '실재'는 이 땅 위가 아니라 저 멀리 있는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포퍼가 플라톤을 '열린사회의 적'으로 간주한 것은 그 때문이다. 어찌 완벽한 논리의 말들만 허용하면서 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좀 더 관용적이었다고 할까? 생각의 차이가 크고, 이견의 골이 깊다면 다소의 열정이 논쟁에 개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발언자와 청중 모두에 해당한다. 약간의 엄밀함이 결여된 추론도 허용 가능할 것이다. 다소 전문 영역의 두 의견이 대립할 때 청중이 그들의 전문성을 따라가지 못해 판단이 어렵다면 그들의 평소 언행과 인격이 판단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에토스의 수사, 파토스의 수사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두 설득의 정당한 방법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고매한 철학자, 박식한 학자, 경험 많은 전문가들에게만 판단의 권리를 줄 수 없다. 그 판단의 결과가 소수 전문가보다 훨씬 많은 다수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내가 무지하다는 이유로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판단의 결정 과정에서 배제될 수는 없다.
같은 이유로 판단의 과정뿐 아니라 설득의 과정, 표현의 과정도 마찬가지다. 논리가 정교한 학자들, 지식이 풍부한 전문가들에게만 표현의 기회가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리다. 언어 권력의 민주화는 판단의 영역뿐 아니라 표현의 영역에도 해당한다. 같은 양질의 발언 기회가 기계적으로 보장될 수 없는 만큼 언어 권력의 약자들도 최소한의 표현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도발적 표현 방식들과 그 장치들을 민주사회에서 보장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명예훼손, 공공의 이익 저해 등 큰 해악이 아니라면 논쟁 당사자들 간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언어 공격을 보장해야 한다. 완벽한 논리, 정제된 감정, 도덕적 덕목의 요구는 자칫 언어를 얼어붙게 만들 수 있다. 언어가 얼어붙으면 침묵과 방조의 사회가 뒤따른다.
교양을 갖추지 못한 말들도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 삶의 질을 결정하는 문제라면 거리낌 없이 표현되어야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다. 민주정치를 건설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래서 언어의 민주화를 제일 먼저 떠올렸고, 수사적 능력을 자기 계발의 기본으로, 수사가 양성을 국가 경영의 기본으로 삼았다.
오늘날 흔히 '댓글'에 대해 지적되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익명 자유 발언을 보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댓글' 문화가 우려를 낳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원문과 필자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발언대의 무게가 댓글보다 원문에 훨씬 더 실려 있는 이상 원문과 달리 댓글의 언어 도발은 보호를 받아야 한다.
익명의 개인과 프로보커터의 차이
도발적 언어를 허용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면 허용 '범위'도 분명해진 셈이다. 이미 언어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사람, 즉 발언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는 거대 미디어, 수많은 청중을 보유하고 있는 언어 권력자들, 소위 인플루언서(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일인 미디어 운영자)들에게까지 도발적 언어가 허용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이미 엄청난 힘을 가진 권력자나 국가가 허용 범위를 넘어 무력을 휘두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힘이 없는 민중이 돌을 든다면 저항이지만 왕과 황제가 돌을 들면 살인마가 된다. 마찬가지로 힘이 없는 익명의 필자가 언어 도발을 한다면 저항, 몸부림으로 읽히겠지만 인플루언서의 언어 도발은 폭력이고 집단을 향한 가해가 된다. 이것이 도발적 언어를 쓰는 익명의 개인과 프로보커터(provocateur, 도발자)의 차이다.
'프로보커터'는 같은 철자의 프랑스어 단어를 영어권에서 차용해 사용한 말이다. '프로보까뙤르'는 '도발자'의 의미로 예술 등 다른 분야에서 자주 사용됐다. 주류 예술계에 도전하는 비주류의 몸부림을 표현하는 용어였다. 달리는 주목 받을 방법이 없으니 도발적 수단을 사용하는 예술가들을 지칭했다.
그러던 것이 최근 정치 분야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한몫 하는 것 같다. 전통 미디어의 주목을 받기 어려운 정치적 비주류 세력이 온라인사회망을 통해 도발적 언사를 시작하면서 생긴 표현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회망을 통한 정보 전달의 영향력이 전통 미디어의 그것에 버금가거나 심지어 넘어서고, 이들 도발자들의 영향력 역시 비주류의 영역을 넘어서 버렸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는 비주류 시절부터 사회망을 통해 도발적인 정치 견해를 표해 많은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정치적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심지어 대통령이 되어서까지 그의 '새벽 트위터질'은 멈추지 않았고 언론과 대중은 그의 트위터에 주목했다. 심지어 참모들도 늘 트위터를 통해 대통령의 의중을 확인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