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현지시간)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이 확정된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의 지지자들이 수도 테헤란에서 그의 사진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전날 치러진 이란 13대 대선에서 강경보수 후보인 라이시가 압도적인 표 차로 당선됐다. 2021.6.19
연합뉴스
지난 18일 이란 대통령 선거 결과 61.9%를 득표한 강경 보수 에브라힘 라이시 후보가 당선됐다. 2위는 11.8%를 득표한 역시 보수 진영의 모센 레자이 후보. 1, 2위 후보 간 격차가 무려 50%포인트에 달하는 보기 드문 대선 결과였다. 온건파 압돌나세르 헴마티 후보는 한 자릿수 득표율에 머무는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
4년 중임제 하의 이란 대통령은 사실상 신정체제인 이란에서 최고지도자(라흐바르 Rahbar)에 이은 두 번째 정치권력이자 행정부의 수반이다. 그리고 이란은 중동 지역의 정세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다. 이란 대선에 국제적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물론 큰 득표차가 보여준 대로 싱거운 승부였다. 하지만 선거 결과의 배경에 대해서는 몇 가지 곱씹어볼 대목이 있다. 역사 속 모든 정치 단위가 그랬지만 특히 글로벌 지구촌 시대에 한 나라의 정치는 내부 상황 못지않게 대외정책과 외교 문제에 큰 영향을 받는다. 이란이 대표적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그랬다.
이란 유권자들에게 이번 대선의 가장 큰 이슈는 경제였다. 그런데 가만 보면 모든 선거가 다 그렇지 않았나?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인데 당연히 경제가 중요한 건 맞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 캠프는 그렇게 외쳤고 덕분에 재미도 톡톡히 봤다. 하지만 꼭 바보라서 경제 외에 다른 걸 짚는 건 아니다.
선거용 구호가 아니라면 경제로 수렴되는 결과에 앞서는 수많은 다른 요인들도 함께 봐야 한다. 경제 침체의 원인이 경제 논리 자체보다 다른 이유인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 요인들을 찾지 못하면 '늘 문제는 경제다.' 역시 이란이 대표적이다. 이번 선거도 그렇다.
수년째 피 말리는 미국의 경제제재로 국민들의 기본적 삶이 무너져 가는 상황, 이번 선거는 그 속에서 치러졌다. 유권자들은 경제를 살리라며 현 집권세력에 회초리를 들었다. 하지만 선거에 승리한 정파는 과연 경제 위기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이란의 혁명 전과 후
이란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40년 넘게 미국과 극한 대립을 하고 있다. 그 기개는 대단하지만 그 사이 국민들의 삶은 말이 아니다. 1990년도만 해도 국내총생산(GDP)이 한국의 두 배였던 이란이 지금은 세 배 가까이 뒤져 있다. 올해 한국의 예상 총생산은 1조 8060억 달러로 추정되는 반면 이란은 6828억 달러로 예상된다.
잘 알려져 있듯 이란은 이슬람 종파 가운데 시아파의 종주국 격이다. 수니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주변의 아랍 국가들과는 극한 대립 중이다. 마호메트의 친족 후손에 대한 정통성 해석 문제와 거기서 파생되는 교리의 차이로 시작된 양 종파의 갈등은 집권 이데올로기와 맞물리면서, 특히 20세기 들어 민족국가가 만들어지면서 회복할 수 없는 갈등으로 치닫게 된다.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이란에서 시아파 신정 국가가 탄생하는 것을 수니파가 다수인 주변 아랍 국가들은 불안한 눈으로 주시하기 시작했다. 역사 속에서 종교는 침략과 세력 확장을 위해 악용돼 왔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같은 이슬람 신정 국가가 탄생하는 것이니 나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싶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종파가 그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봉기한다면 그때부터는 교리가 아니라 세력과 패권의 문제가 된다. 현재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괴리는 이슬람과 타 종교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깊다. 종교적 가치관이 멀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가까워서다. 유사 세력 간 라이벌 의식과 세력 다툼은 종교계도 비켜가기 어려운 법이다.
이란과 영토 갈등을 겪던 이웃나라 이라크의 경우 국민 다수가 시아파인 반면 집권세력은 수니파다. 이들 집권세력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래서다. 주변 아랍 국가의 눈엔 이란의 최종목표가 모든 이슬람 국가 내부에 있는 소수 시아파를 봉기하도록 해 시아파가 지배하는 이슬람 세계를 건설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배경에서 이라크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8년이나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 전쟁으로 뜻밖에 이란이 깨달은 것은 이 세상에 자신들의 편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라크가 선제공격을 했음에도 국제 여론은 자신들과 반대로 흐른다는 사실을 이들은 전쟁 초반까지만 해도 깨닫지 못했다.
팔레비 왕조의 이란은 미국의 중동지역 거점이었다. 친미국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혁명 이후 반미로 돌아선 이란의 변화 앞에서 미국은 이란의 지역 라이벌인 이라크에 접근을 하게 된다. 훗날 부시 정권 당시 미군에 쫓겨 비참한 최후를 맞은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당시에는 미국의 은밀한 파트너였다.
혁명세력의 갈등, 이슬람 근본주의 확산
어쨌든 이란의 혁명세력은 이때부터 노선 갈등을 겪는다.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서 좀 더 자강 능력을 갖춰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핵무기를 비롯한 비대칭전력을 보강해야 한다고 믿는 주류 세력은 이때부터 핵개발에 매달린다. 이들 주류 세력은 경제적으로는 자유 시장 경제를 선호한다.
그래서 시장의 불평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신이 용인한 세상의 이치라고 믿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선행위, 복지 등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란의 세 번째 대통령이자 현재의 최고지도자(라흐바르) 알리 하메네이가 대표적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