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터키

1?다시 카이세리로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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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원(suriya)등록 2021.06.24 17:46
2021년 이 코로나 시대에 나는 터키를 떠날 준비를 한다. '터키'라고 발음하면 어느새 제2의 모국처럼 가슴 속 깊숙이에서 점차 그리움이 차오르는 나를 발견한다. 나도 모르게 시나브로 문득 터키를 사랑하고 있었나 보다. 어쩌면 나의 한창 때를 보낸 2000년부터 햇수로 3년의 터키살이가 그 다음의 내 인생을 좌우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터키에서 돌아온지 20년만에 다시 같은 도시로 복귀하는 나의 터키 인생을 마음 가는대로 써내려가보려고 한다. 
 
2000년 9월의 카이세리
때는 바야흐로 2000년 9월 8일. 햇볕이 쨍쨍한 터키 중부 고원지대의 중소도시 카이세리 공항에 내리니 활주로 한복판에 기관총을 든 그린 베레의 터키 군인이 마네킹처럼 서있었다. 생경하면서 인상깊었다. 내 기억의 첫장면이다. 거의 문화충격이라 할까. 알고보니 카이세리 공항은 원래 군사목적으로 지어졌는데 근처 카파도키아라는 관광지가 알려져 민간에서도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
그렇게 나는 근 4,000미터나 되는 만년설을 이고 있는 에르지예스 산이 있어 그 이름을 따서 지은 '에르지예스대학교'에 부임하여 카이세리에 둥지를 틀 틀었다.
나의 임무는 터키에 한국학 관련 학과를 설립하는 일.
문제는 터키가 이슬람국가인지 모르고 가게 된 것이다. 내 인생이 어찌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를 모토로 살고 있는 것같다. 내가 아는 이슬람이란 그때까지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으로 이슬람을 믿지 않으면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이교도를 박해했다는 편견만이 머릿 속에 가득하였다.
근무하게 된 대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기도 시간을 알리는 우렁찬 '아잔'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금은 영화 '바그다드 카페'의 배경음악같기도 한 페이소스 넘치는 그 소리..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정책의 나라에서 유일하게 대학교 안에 모스크라는 이슬람 사원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마치 뱃 속에서 개구리가 우는 것 같은 황당한 느낌을 받으며 너무나 난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공교롭게도 나는 여섯 살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교회를 시계 추처럼 왔다가갔다 하였다. 성경은 읽지도 않으면서 이슬람과 대척점에 오래 서있던 종교를 어린 시절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나는 그냥 이슬람이 싫었다. 아니 싫어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인도를 여행할 때도 불상의 머리들이 다 훼손되었는데 그것이 다 이슬람이 자기의 종교가 아니라 그렇게 했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인샬라, 신이 원한다면
게다가 한 1년동안은 터키사람들이 말끝마다 '인샬라'를 외치고는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아 내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신이 원한다면'정도로 번역되는 이 말은 학과 설립에 필요한 여러 준비 서류와 물건들을 학과장과 학장에게 요청하는 회의를 할 때마다 듣게 되었다. 거의 회의하는게 일과였는데 매일 회의는 왜 이렇게 긴 건지 그리고 겨우 서로의 약속을 적은 서류에 사인하면 반드시 '인샬라'를 외치는데 그 다음에 약속한 날에는 아무것도 진척되지 않은 적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터키 한국학의 메카가 된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학과 학과장 하티제선생에게 '인샬라'의 뜻은 책임회피용 말인가 물었다. 그랬더니 그 반대라며 불가능한 일도 그렇게 말하면 이루어지는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알라신은 왜 나한테만 될 일도 안 되게 하는 것일까. 그렇게 한 1년동안 이슬람 문화와 사회를 미워하느라 내 청춘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차피 이슬람국가에서 살면서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이렇게 알지도 못하고 무턱대고 미워만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 때 한국에 와서 이슬람 관련 책을 모조리 구해서 한 1년동안 '꾸란' 공부도 하면서 이슬람공부를 착실히 하였다.
그랬더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자유 평등 박애 보시' 이것이 내가 알게 된 이슬람의 본질이었다.
 
터키의 진면목
그러고 보니 그제서야 하루에 다섯 번씩 언제 어디서든 작은 양탄자를 펴놓고 기도하는 사람이 다시 보였다. 그동안은 가게에 무엇을 사러 들어갔는데 주인이 없다. 어디 갔지 하며 두리번거리면 가게 한 쪽에서 엎드려 기도하는 가게 주인이 있었다. 그렇게 하루에 다섯 번씩 자신을 낮추며 가장 낮은 자세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무슨 나쁜 짓을 할 수 있을까. 3년동안 나는 다섯살 짜리 딸을 데리고 틈틈이 터키 전역과 이웃 나라들을 여행하며 집을 비웠다. 오래된 아파트의 열쇠는 있으나 마나인데다 1.5층에 사는 우리 집에 도둑이 들까봐 처음에는 불안하였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아주 작은 무엇하나 잃어버려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어린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외국여성에게 늘 자리를 양보하고 모든 순서에 우선권을 주었다. 이것이 본래 면목의 터키였던 것이다. 내가 편견과 선입관을 가지고 터키를 바라볼 때 그들은 이미 형제의 나라에서 온 한국의 모녀를 따뜻이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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