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중에도 저런 애 있어, 남자 데리고 소박하게 잘 살더라고, 둘 다 성격이 참 좋아." 게이를 호모라고 부르지만, 혐오주의자는 아닌 이 퀴어(Queer)한 사람의 탄생.
픽사베이
언젠가 한 친구가 자신의 할아버지와 함께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보이그룹 멤버들이 매우 '성애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으로 등장해 당황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영상의 내용까지 정말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 예능에는 동성 출연진 간의 맥락 없는 '커플링'이 자주 등장하곤 하니까.)
할아버지는 '왜 쟤네는 남자끼리 저러고 있느냐, 쟤네 호모들이냐'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는 자신의 할아버지도 훨씬 보수적인 시대를 살아왔으니 이 정도의 혐오는 가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할아버지의 그다음 말이었다.
"아, 내 친구 중에도 저런 애 있어. 남자 데리고 소박하게 잘 살더라고. 둘 다 성격이 참 좋아."
이 미스터리한 대화의 흐름을 곰곰이 생각한 후 친구와 나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아마 할아버지는 남성 동성애자를 '호모'라고 지칭하는 게 무례한 일인지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동성애'라는 개념 자체가 머릿속에 없었을 수도 있다. 다만 경로는 알 수 없으나, 어쩌다 할아버지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들이 '호모'라고 지칭됨을 알았을 수는 있다(혹은 상대적으로 젊은 내 친구가 영어식 표현을 써야 알아들으리라 지레짐작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에게 '호모'로 사는 건 딱히 이상한 게 아니고, 심지어 그렇게 사는 사람이 주변에 있기까지 했다. 즉 게이를 호모라고 부르지만, 혐오주의자는 아닌 이 퀴어(Queer)한 사람이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혐오는 지성의 문제?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
한때 웃으며 넘겼던 이 에피소드가 다시 떠오른 것은 얼마 전이다. 나는 페미니스트 책방 '달리, 봄'이 주관한 <퀴어한 서재>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당시 '인생은 우리가 완벽히 알 수 없기에 황홀하며,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니 차별과 혐오를 내려놓고 낯선 존재들에게 겸손해지자'는 요지의 글을 썼다. 쓸 때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다시 돌아보니 언젠가 내가 했던 이야기와 모순이 되는 내용이었다.
한때 나는 혐오란 '무지의 소산'이며, 이는 소수자를 제대로 알기를 거부하는 게으름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혐오는 지성의 문제'라는 말에도 별로 거부감이 없었다. 그런데 '낯선 존재'는 사실 '미지의 존재'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는 글에 '내가 모르는 대상'이라도 차별하고 혐오하지 말라는 주장을 한 셈이다.
'혐오는 지능순', '혐오는 지성의 문제'와 같은 표현을 SNS에서 찾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런 식의 이야기에 '좋아요'를 누르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사회가 정상성을 부여하는 '지적 능력'이라는 것은 사실 보편이 아니다. 그리고 능력의 다름은 차이로 여겨야지, 이걸 '격차'라고 해석하는 건 매우 무례한 일이다. '지능순'이라는 말이 문제인 이유다.
또한 사람은 태어나고 자란 환경에 따라 취득할 수 있는 정보의 범위도 무척 상이하다. 지역·계급·교육 환경 등에 따라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모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알기 어렵고 모를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자연스레 차별주의자나 혐오자가 되는 것인가. 지식이 없는 사람은 곧바로 혐오를 가지게 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알면서도 혐오를 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