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구한 다부동 55일간의 전투(전 국토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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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걸(ingirl8573)등록 2021.05.11 14:13
대한민국을 구한 다부동 55일간의 전투(전 국토의 10%만 남은 상황)를 아는가?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에 위치한 '다부동전적기념관'을 다녀왔다. 이날 전시관을 둘러 볼 예정이었으나 실내 재단장을 하는 관계로 다음으로 미뤘다. 실외만 둘러 보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에서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1129일(3년 1개월) 동안의 전쟁은 대한민국이 유엔 참전 국과 함께 공산세력의 적화 의도를 막아낸 '세계자유수호전쟁'이자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 전쟁'이었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우리 국군은 3일만에 서울을 빼앗겼고 1개월여만에 전 국토의 10%만 남은 상황이 됐다.
만약 다부동전투에서 졌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을지도 모른다.

남북한 군사력(1950. 6.24 기준)
앞은 국군 뒤는 북한군
병력 : 103,827명 vs 201,050명
전차 : 0대 vs 242대
화포 : 1,051문 vs 2, 492문
항공기 : 22대 vs 226대
함정 : 36척 vs 110척

절대적으로 불리한 국군의 군사력으로, 다부동 전투는 유엔군과 함께 북한군을 물리치고 인천상륙작전(9. 15)성공의 발판을 마련해 서울을 탈환(9. 28)하고 압록강 인근까지 진격(10. 1 ~ 10. 26)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대한민국을 구한 다부동 55일
1950. 8.1 ~ 9. 24(55일간)
낙동강방어선(240km)에서 가장 전략적 요충지
1단계 : 낙동강 연안 방어작전(자고산~328고지~유학산)
2단계 : 주 저항선 공방전(치열한 고지 쟁탈전)
3단계 : 적 방어선 돌파/반격

1. 삶과 죽음의 경계, 왜관 철교(왜관철교를 폭파해 적 전차도하 저지, 공격 지연에 성공)
2. 혈맹국의 희생, 자고산 전투
3. 가장 치열했던 328고지 전투(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주인이 15회 바뀜)
4. 전무후무한 융단폭격
5. 시산혈하의 유학산 전투(수세에 몰렸던 아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전투)
6. 최초의 전차전, 볼링엘리 전토(칠곡 가산면 천평에서 벌어진 전차전, 전차폭음이 볼링공으로 핀을 넘어뜨릴 때 모양과 유사)
7. 보이지 않는 숭고한 희생(다부동전투에서 조국을 위해 희생한 경찰과 학도병, 전국 경찰 15,000명 투입)

55일 간 전투에서 아군 1만여 명, 적군 17,500명의 사상자 발생.

우리는 이 전투를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이 곳이 뚫렸다면 아마 지금의 대한민국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이 일대에서 전투에 참여한 분들이 전쟁 후유증(탄환이 여러 발 몸에 박힌 분들, 신체 일부를 잃은 분들 등)을 겪고 있다. 우리 할아버지는 국군의 시체와 복한군의 시체를 지게로 옮겨 묻어주었다고 들려 주셨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을 바친 이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넋을 기린다.
아쉬운 점은, 그들이 몸 바쳐 이뤄 낸 조국이지만 쉽게 잊혀져 버리고 찾는 이들이 드물다는 것이다. 아무리 삭막하고 각박한 세상이라지만 틈이 나면 이 곳을 찾아 숭고한 희생자들에게 묵념을 올리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쉽게 얻은 자유는 결코 아니다.

우리를 도와 전투부대를 파병한 유엔 16개국(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공, 룩셈부르크) 이외에도 의료, 전시 물자원, 전후복구 지원국이 있었으며 지원의사를 표명한 3개국이 있었다. 절대 그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위 기사는 일부 '다부동전적기념관의 홍보물 및 육군군사연구소의 자료'를 참조해 작성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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