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멸망 직전에는 "해독이 날로 깊어 백성들이 원망하였다"는 <고려사절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동산 문제가 대중이 인내할 수 있는 한도를 이미 초월한 상태였다. 사진은 광명·시흥 신도시가 들어설 부지를 LH(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들이 사전 개발정보를 이용해 사들였다는 의혹이 제기된 토지인 경기도 시흥시 무지내동 341번지
유성호
고려판 부동산 이슈
어느 시대건, 토지개혁이 쟁점화 되면 개혁파보다는 보수파가 유리하다. 국유지만 손보는 것이든 민전까지 손보는 것이든, 민전(民田) 대지주들은 보수파에 가담한다. 대개의 경우 이들 대지주들은 비판 여론을 조성하면서 '경제가 위태해진다', '정권이 서민들을 죽인다'며 일반 대중과 개혁파를 갈라놓으려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동일하게 이럴 때는 대지주들이 서민경제를 염려한다.
하지만 고려 멸망 직전에는 대지주들이 대중과 개혁파를 갈라놓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해독이 날로 깊어 백성들이 원망하였다"는 <고려사절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의 부동산 문제는 대중이 인내할 수 있는 한도를 이미 초월한 상태였다.
공전이나 사전을 소작하는 농민들의 삶이 극도로 불안정했을 뿐 아니라 이것이 일반 민전을 소작하는 농민들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래서 특권층과 대지주들의 여론전이 농민들에게 먹혀들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았다.
거기다가 개혁파를 군사적으로 뒷받침하는 이성계 군단이 있었다. 이 군단을 포함한 공권력이 개혁파의 수중에 있었다는 점은 이들이 부동산 이슈를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들의 토지개혁은 발의 얼마 뒤 여론의 역공을 받고 좌초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 세계 최강국인 몽골(원나라)이 무너진 지 얼마 뒤라 전 세계적으로 정치질서가 혼란스러웠다. 중국도 그랬고 일본도 그랬고 오키나와 왕국도 그랬다. 이랬기 때문에 동아시아 지배층의 응집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불안정한 과도기 상황도 토지개혁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토지개혁의 선두주자인 조준의 성격도 한몫했다. <조준 졸기>에 설명된 것처럼 그는 특권층 가문에서 출생했으면서도 귀공자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술 마시고 아무 데서나 자는 모습에서도 그 점을 느낄 수 있다. 또 포부가 클 뿐 아니라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이는 그가 기득권층의 저항에 굴하지 않고 개혁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 도움이 됐다.
완전한 의미의 토지개혁은 아닐지라도 조준의 개혁은 한민족 토지문제가 한 단계 전진하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정몽주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도록 만드는 데도 촉매제 역할을 했다. 이성계 진영과 손잡고 개혁을 추진하던 정몽주는 토지개혁이 이슈화되자 생각을 바꾸게 됐고, 결국에는 개혁파와 맞서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정몽주를 그 방향으로 움직인 근본 원인은 조준한테서 나왔다. 정몽주는 자신이 이성계 캠프를 떠나야 할 이유를 조준을 바라보면서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준 역시 이성계·정도전·이방원 못지않은 정몽주의 라이벌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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