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6일 오는 7월 개막 예정인 도쿄 올림픽 불참을 선언했다.
연합뉴스
북한의 도쿄 올림픽 불참 선언이 파장을 낳고 있다. 누구보다 일본 정부가 당황했다. 북한 체육성이 불참 결정을 발표한 지난 6일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현실을 얼른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닛폰뉴스네트워크>와 한 인터뷰에서 "일방적인 발표라고 듣고 있을 뿐"이라고 한 뒤 북한의 번복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지금까지 그런 일은 몇 번이나 있지 않았나 하는 식으로 생각한다"며 희망 섞인 답변을 내놓았다.
바이든 행정부를 중심으로 한미일 협력 체제를 구성한 한국도 민감하게 대처하고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8일 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도쿄 올림픽이 평화 올림픽이 될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북한의 참가를 관철해 평화 올림픽을 실현하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올림픽 헌장 제2조 제10항은 "스포츠와 선수의 정치적·상업적 남용을 반대한다"고 선언한다. 제16조 제1항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의 취임 선서에 "어떠한 정치적·상업적 영향력이나 인종적·종교적 이유를 초월하며"라는 문구를 넣도록 했다.
올림픽 헌장은 이처럼 올림픽의 정치화를 경계하고 있지만,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는 국가는 드물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올림픽의 정치화는 현실이다.
올림픽은 정치의 공간
이에 관해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선례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총리 취임 3년 뒤에 개최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패전 독일의 국위 선양 무대로 활용했다. 또 유대인 박해 등의 인종차별을 은폐하고자 '관대한 독일'의 이미지를 보여주려 했다. 그러면서도 오륜기와 더불어 나치 깃발이 펄럭이도록 했다.
베를린 올림픽 때 처음 도입된 성화 봉송도 정치적 해석을 낳을 만했다. 성화 봉송 경로가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진주했던 지역일 뿐 아니라 제2차 대전 때도 그런 지역이 됐기 때문이다. 1984년 2월 6일 자 <동아일보> 기사 '서부의 악당과 맞선 올림피아 사람들'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 성화는 세계 제1차 대전 때 독일제국 침략의 말발굽 소리가 울린 불가리아, 유고,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를 거쳐 베를린 스타디움에 입성했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이 성화 봉송로에 있었던 대다수는 얼마 뒤 히틀러에 무릎을 꿇었다. 오스트리아는 1938년 3월 독일에 강점됐고, 체코는 1939년 3월 침공을 당했다.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는 독일군이 1941년 4월 발칸반도(터키 맞은편)로 진군한 뒤 항복했다. 이런 객관적 상황 때문에 베를린 올림픽 성화 봉송은 독일의 침략 의지를 상징하는 이벤트로 해석되고 말았다.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활용한 또 다른 대표적 사례로 제2차 대전 패전국에서 개최된 1964년 도쿄 올림픽을 들 수 있다. 1940년에도 도쿄 올림픽을 유치했다가 자국이 일으킨 중일전쟁 때문에 대회를 반납했던 일본은 24년 만에 열게 된 올림픽을 통해 자국의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했다.
일본이 보여주고자 했던 이미지 중 하나는 '일본은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올림픽 개막 이틀 전의 상황을 보도한 1964년 10월 8일 자 <조선일보> '성화, 동경에 도착'에 이런 대목이 있다.
8일에 들어오는 제1코스와 9일에 도착하는 제2코스의 성화가 모두 합류되면 97개국 8천여 젊음이 흘러넘치는 10일의 메인 스타디움으로 원폭의 아들로 불리는 사까이 최종주자가 메인 스타디움 성화대에 옮긴 불이 활활 타올라 세계만방에 불길을 밝히면서 인류의 체육 잔치는 막을 올린다.
지난 2014년 작고한 사카이 요시노리는 1945년 8월 6일 출생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에 태어났던 것이다. 원자탄 투하 1시간 반 뒤, 그는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 '원폭의 아들'로 불렸다.
그가 아픔을 안고 태어난 일은 온 인류가 연민을 가질 만하지만, '원폭의 아들'을 최종주자로 선정해 세계적 주목을 받게 한 일본 정부의 조치는 자국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이미지를 조성하는 효과를 낳을 만했다.
일본은 '자위대가 위험하지 않다는 메시지'도 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올림픽에 헌신하는 자위대'의 이미지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2008년에 한국국제정치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김석수 한국외대 연구위원의 발표문 '동경 올림픽의 정치경제학적 의의'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64년 이전에 자위대의 이미지가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글이다.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의 발족이 극히 정치적으로 위로부터 강요되었던 것과 헌법 제9조 위반이 문제점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에, 자위대는 일본 국민으로부터 항상 감시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자위대원의 고립감과 소외감은 아주 심각했다.
자국을 지키는 실질적 군대가 이웃 나라들은 물론이고 자국민들한테까지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하고자, 일본 정부는 자위대 소속의 운동선수가 올림픽 경기에서 메달을 획득해 일장기를 올리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자위대체육학교를 개설하고 22명의 군인을 선수로 참가시켰다.
또 자위대가 '봉사하는 군대'임을 보여주고자 군인들과 군사 장비를 대회 지원을 위해 투입했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헬기 12대, 함정 72척, 차량 742대, 통신기기 229대, 포 4문, 상륙정 5척, 7545인의 자위대원이 올림픽에 참가했다. 협력 부분은 식전, 근대오종, 마술, 사격, 클레이사격, 사이클, 육상, 카누, 조정, 유도, 요요기와 하치오치 선수촌, 수송, 위생 14개 부분에 걸쳐 있었다. 따라서 자위대가 담당했던 분야는 생각 이상으로 광범위했다. 식전 연주에서 선수단 입장의 팻말, 축포, 발사, 그 외 경기장 운영을 보조하고 마술의 출발점과 결승점의 말을 위한 급수까지 처리했다.
군인들의 올림픽 보조를 좋다 나쁘다 평하기는 힘들지만, 당시의 일본은 실질적 군대인 자위대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불식할 목적으로 군대의 올림픽 지원을 관철했다.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북한 불참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