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 운하
U.S. National Archives
만약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지 않았다면, 또는 운하의 지배권을 영국이 소유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아시아 여러 나라의 국경지역에 남아 있는 영국 지배의 흔적들이 지금과 같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물론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국의 지배는 운하가 완성되기 조금 이전에 시작됐다. 하지만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향하는 여정이 지배 기간 동안 계속 됐다면 이들의 지배력이 역사 속의 현실과 같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러시아의 경우를 보면 더욱 그렇다.
얼핏 러시아와 일본이 이웃국가로 생각될 수 있지만 그건 지금의 생각이다. 과거 시베리아가 지금처럼 개발되지 않았을 때, (물론 지금도 개발이라는 말이 어색하지만) 당시의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국가일 뿐, 주력 육군이 극동지역까지 오려면 수 주일이 소요됐다. 그리고 극동지역에는 10만여 병사만 있었고 이는 일본의 25만에 비하면 절대 열세였다.
해군 전력의 상황은 더했다. 러시아 해군의 주력 함대가 일본으로 오려면 북쪽 발트해에서 대서양을 지나, 또는 남쪽 흑해에서 지중해를 거쳐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필리핀을 지나 일본까지 와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북극해는 얼음 때문에 짧은 거리에도 불구하고 이용할 수 없는 바다였다.
그렇게 수개월이 걸리는 여정을 지나 일본에 도달하면 아무리 젊은 장정들이라도 전쟁은커녕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만약 러시아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었다면 전쟁의 양상이 적어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억측만은 아니다.
러시아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후술하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쓰시마 앞바다에 도착한 러시아 함대는 당시까지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이라는 세계의 관심 속에서 일본 함대에 대패하고 만다. 이렇게 일방적 일본의 승리로 끝난 쓰시마 해전의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포츠머스 조약으로 이어져 조선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이 인정되는 결과를 빚는다.
이처럼 수에즈 운하의 존재는 역사의 여러 장면을 바꾸었거나 바꿀 수도 있었고, 실제 여러 민족의 운명을 바꿔놓기도 했다. 운하가 개통된 지 87년이 지난 1956년, 민족주의 열기로 가득 찬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전격 선언했고, 당연히 크게 반발한 영국은 프랑스와 이스라엘을 끌어들여 이집트를 향한 일방적 전쟁을 선포했다. 이것이 2차 중동전쟁이다.
여기서도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이집트가 다시 운하의 운영권을 빼앗기는 결과이겠지만 역사는 눈앞의 판단과 다르게 흐를 때가 많다. 객관적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는 비록 전쟁에서는 졌지만 수에즈 운하의 지배권을 지킬 수 있었다. 러시아의 뒤를 이은 소련이 이번에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이집트를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전을 원하지 않는 미국이 우방국 영국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운하의 지배권은 건드리지 못하게 했고, 예상 밖의 결과를 얻은 이집트는 이후 중동의 강자로 인식되는 계기가 된다. 반대로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압력으로 본래의 목적을 얻지 못한 영국은 세계 최강의 지위를 미국에 넘겨준 사실을 잔인하게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선박 좌초 사건이 남긴 것
그 밖에도 수에즈 운하의 출현이 바꾼 역사는 수없이 많다. 기술의 발달로 인한 패러다임의 전환도 이유가 되지만 수에즈 운하의 존재는 기존의 범선이 급속히 퇴조하고 증기선이 대세가 되는 계기도 만들었다. 바람을 이용해 시원하게 달리는 대서양과 달리 잔잔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려면 범선으로는 아무래도 힘들다.
운하의 폭과 수심이 제한되다 보니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려면 배의 건조도 '수에즈 사이즈'에 맞춰야 한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수에즈막스(Suezmax)다. 짐을 가득 채운 상태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13~15만 톤급의 선박이다. 그 외에도 선박을 수용할 수 있는 운하, 항구의 기준에 따라 케이프 사이즈(Cape Size), 파나막스(Panamax) 등으로 선박의 크기를 분류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러시아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지 못한 것은 당시의 수에즈 운하 규격을 러시아 함대가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지전에서 아무리 훌륭한 전차가 있어도 길이 제한되면 진군할 수 없듯이. 이처럼 이동 수단을 가능하게 하는 인프라는 이동 수단 못지않게 중요한 요인이 된다.
지난 3월 23일 말레이시아를 출발해 네덜란드로 향하던 일본 쇼에이기선 소유의 대만 에버그린 해운 소속 에버기븐(Ever Given) 함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수에즈 운하 수로 중간에 좌초했다. 수에즈막스 기준에는 통과했으나 길이가 운하의 폭보다 긴 선박이 비스듬히 선 채 운하를 완전히 막아 서 버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