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한 일본 고교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2021.3.30
연합뉴스
한일관계가 정체 국면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가운데, 불난 데 기름 붓는 식의 조치가 스가 요시히데 내각에서 나왔다. 독도를 일본 고유 영토로 가르치도록 규정한 2018년 학습지도요령에 따라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는 서술이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늘어난 것이다.
2016년에 검정을 통과해 2017년부터 사용된 고등학교 1학년 사회교과서의 경우, 35종 가운데 27종이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다',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표현을 담았다. 지난 3월 30일 검정 통과가 발표돼 내년부터 사용될 1학년 사회교과서에서는 그 비중이 더 높아졌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역사총합(12종), 지리총합(6종), 공공(12종) 등 3개 사회과목 교과서 총 30종 중 대부분에 일본 정부의 일방적인 독도 영유권 주장이 담겼다. 지리총합과 공공을 합한 18종에서는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다' 혹은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라는 표현이 반영됐다고 한다. 또 역사총합 12종은 대체로 독도가 일본 영토에 편입되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으며, 일부 역사교과서가 독도는 일본 고유 영토라고 명기했다. 전체적으로 독도 영유권에 대한 허위 주장이 한층 강화됐다.
그와 함께 나타난 또 다른 특징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술이 축소됐다는 점이다. 역사총합에서 위안부에 관한 기술이 대체로 축소됐고, 관련 내용이 아예 삭제된 교과서도 있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는 교과서의 비중도 줄어들었다.
1993년 고노 담화에서 일본 정부는 "우리는 이런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는 일이 없이 오히려 이를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해 가고 싶다"라며 "우리는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이런 문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 한번 표명한다"라고 약속했다.
아베 신조 총리가 고노 담화를 깨트리고 싶어 했지만, 이 담화는 여전히 일본 정부의 공식 언명으로 남아 있다. 공식 담화를 통해 '역사 교육을 통한 위안부 문제의 반성'을 약속해 놓고도 독도에 대한 허위 주장을 늘리는 기회에 위안부에 관한 서술을 교과서에서 축소한 것이다.
피해자 행세
지금의 한일관계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도 부담스럽다. 일본 경제를 위해서라도 빨리 탈피해야 할 상황이다. 2010년을 기점으로 중국에 추월당한 일본 경제는 오늘날에는 한국의 추월까지 우려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그래서 한층 활성화돼야 할 일본 경제가 한일 관계 때문에 지장을 받고 있으니, 일본 역시 지금 상황을 신속히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시점에서 독도에 관한 허위 주장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은, 2018년 학습지도요령 때문인 측면도 있지만, 일본 정부와 극우세력의 필요에 부응하는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자국 경제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걱정하는 것이 있다. 일본이 우려하는 것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위안부 배상 판결로 인해 자국의 도덕적 수세가 점점 심각해지는 현상이다. 일본 극우세력 입장에서는 이번 교과서 검정이 그런 열세를 만회하는 계기로 인식될 수도 있다.
미국·인도·호주와 함께 대 중국 공세를 강화해야 할 이때에 도덕적 수세에 몰리면 한국은 물론이고 북한·중국에도 반격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일본 정부는 경제 문제 못지않게 윤리적 수세 문제도 깊이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은 '강제징용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결됐으며 '위안부 문제'는 청구권 협정에 더해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의해서도 종결됐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설령 일본의 주장대로 두 문제가 해결됐다고 쳐도, 일본이 두 사안의 가해자라는 점은 불변의 사실이다.
가해자가 어느 정도 사과를 하고 어느 정도 물질적 제공을 했다 해도 피해자의 한이 온전히 풀리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때는 가해자가 거듭거듭 사과하는 게 이치에 맞다. 강제징용·위안부 문제가 바로 이런 경우에 포함된다. 일본이 그 어떤 논리를 댄다 해도 피해자들의 절규가 계속되는 한 일본이 두 사안에서 빠져나갈 길은 없다.
그런데 일본의 시각에서 볼 때, 독도 영유권의 경우에는 다소 색다른 측면이 있다. 이제까지 일본은 이 사안에서 스스로를 피해자로 설정해왔다. 일종의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왔던 것이다.
일본 외무성이 운영하는
독도 홈페이지는 한국을 불법행위자, 가해자로 설정하고 있다. 이 홈페이지의 첫 면에 있는 '다케시마 영유권에 관한 일본국의 일관된 입장(이하 '입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한국에 의한 다케시마 점거는 국제법상 아무런 근거가 없이 행해지는 불법 점거이며, 한국이 이런 불법 점거에 따라 다케시마에 대해 실시하는 그 어떤 조치도 법적인 정당성을 가지지 않습니다.
일본은 독도를 시마네현에 최초로 편입한 날이 1905년 2월 22일임을 상당히 많이 의식하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독도를 편입한 사실이 약점이 될 수도 있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내놓은 대처법 중 하나가 '1905년 2월 22일 이전의 독도는 한국과 관련이 없었다'는 논리다. 빼앗은 게 아님을 강조하고자 그런 논리를 펴는 것이다.
"일본이 다케시마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영유권을 재확인한 1905년 이전에 한국이 다케시마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을 나타내는 명확한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습니다"라고 위 '입장'은 주장한다.
'근거가 없다'고 하지 않고 '명확한 근거가 없다'라고 했다. 이런 모호한 표현으로 한국과 독도의 관련성을 부정한 뒤, '원래부터 일본 땅이었던 독도를 한국이 침탈하고 있다'며 '한국=가해자' 이미지를 조장한다.
일본은 한국의 불법성을 부각할 목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뒤에 한국이 연합국들을 무시하고 독도를 무단 점거했다는 주장까지 펼친다. 패망한 일본이 연합국의 점령을 받는 동안에 한국이 법적 근거도 없이 임의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패망과 함께 일본 공권력이 독도와 한반도를 떠나는 분위기에서, 한국인들은 독도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당연히 회복했다. 일본의 주장은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다. 한국인들이 한국 땅을 회수할 때, 일본인들이 요구하는 국제법적 근거를 충족할 필요는 없다. 빼앗긴 것을 되찾아간 사람한테 국제법적 근거를 거론하며 '도로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모습이 과연 사리에 맞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905년 이전에도 독도는 한국 땅이 아니었다'는 허위 주장과 더불어 '한국이 제2차 대전 뒤에 법적 근거도 없이 가져갔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통해 일본은 자국을 피해자로, 한국을 가해자로 만들려 하고 있다.
일본 극우세력 입장에서는 독도를 부각할 경우에 '일본=피해자'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할 수도 있다.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로 도덕적 수세에 몰린 자국이 독도와 관련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통해 국면 전환을 이룰 여지가 있다고 판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일본이 강제징용·위안부 문제를 순리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독도로 맞불을 놓아 한국의 공세를 약화하려는 시도를 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고개 숙이고 사과하기보다는 험악한 인상을 쓰며 상대방을 가해자로 모는 전략을 구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