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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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틈을 놓치지 않고 김일성에게 도전장을 내민 인물이 있다. <김대중 자서전> 제1권에도 언급된 옌안(연안)파 거두 최창익이 바로 그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2월 만 22세의 김대중이 좌우합작 구호가 마음에 들어 참여한 정당이 바로 최창익의 당이었다. "신민당은 중국 옌안에서 돌아온 독립동맹 참가자들이 만든 정당인데, 김두봉·최창익 등이 전면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김대중은 말한다.
최창익은 김일성보다 16년 전인 1896년 함경북도 최북단인 온성군에서 출생했다. 1925년에 와세다대학 경제과를 졸업한 그는 전공과 관계없어 보이는 곳에 '취직'했다. 29세였던 이 해에 그가 시작한 일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일본을 잡고자 제국주의의 천적인 공산주의에 뛰어든 최창익은 1928년에 체포되는 시련이 있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투쟁을 계속했고, 1942년에는 중국 내륙인 산시성 옌안에서 조선독립동맹 부주석에 취임했다. 전공인 경제학과에 맞는 자리는 해방 뒤에 찾아왔다. 북조선노동당 정치위원이 되고 북조선인민위원회 검열국장을 거친 그는 북한 정부가 수립된 1948년 9월 9일 재정상에 임명됐다.
그는 한국전쟁 중에는 내각의 공동 2인자에도 올랐다. 1952년 11월 23일 자 <조선일보> '북한 괴뢰정권 부수상 2명을 증가'는 11월 18일 자 인사 조치를 보도하면서 "재정상 최창익과 농업상 정일룡이 새로 부수상으로 임명되었는 바, 이로써 괴뢰정권의 부수상은 종래의 박헌영(외상 겸), 홍명희, 허가의(허가이)에 전기(前記) 2명을 합하여 5명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지도부에 오른 그는 문제의 1956년에 김일성에 대한 일격을 준비했다. 국내파·만주파와 더불어 북한 정부 수립의 4대 주역인 소련파·옌안파 양대 세력이 그와 함께했다. 소련 귀화자 출신들인 소련파와 옌안 등지에서 투쟁한 옌안파는 흐루쇼프가 일으킨 태풍을 타고 김일성 공격에 나섰다.
김성보 연세대 교수의 <북한의 역사> 제1권은 소련 외교 문서에 근거한 백준기의 연구를 기초로, 최창익에게 김일성 공격을 건의한 사람은 소련대사 이바노프였다고 한 뒤 최창익과 소련파·옌안파의 목표와 관련해 "그들은 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통해 합법적 방법으로 김일성을 당 위원장에서 끌어내리고자 했다"라고 설명한다. 노동당 최고기관인 중앙위원회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김일성의 위원장직을 박탈하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당시 김일성은 노동당 중앙위원장뿐 아니라 노동당 밑의 내각을 통할하는 내각 수상이기도 했다. 또 인민군 최고사령관도 겸했다. 최창익은 그 직책들 중에서 노동당 및 인민군 직책을 거둬들인 뒤 노동당 중앙위원장은 자신이 맡고, 최고사령관은 최용건이 맡도록 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김일성은 오로지 내각 수상에만 전념하도록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스탈린을 끌어내린 소련과 보조를 맞춰 김일성의 위상을 떨어트리고자 했던 것이다.
김일성을 '1인'에서 '3인 중 1인'으로 끌어내리는 구상은 상당히 낭만적이었다. 군대 동원 없이 최고 권력자를 끌어내릴 계획을 세운 것도 그렇지만, 그렇게 끌어내린 뒤 내각 운영에만 전념하도록 만들겠다는 발상을 했다는 것도 그렇다.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버티고 있으므로 김일성이 함부로 도발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이런 낭만적 계획을 세운 데는 그 직전 사례에 대한 믿음도 상당 부분 작용했다. 2019년 3월호 월간 <북한> 기사 '소련 비밀자료 속 북한 인물들 : 이상조 주소련대사의 망명'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 계획의 모델은 같은 해 4월 벌어진 불가리아 공산당 당수이자 수상인 벌코 체르벤코프 해임 사건이었다. 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토도르 지프코프 제1비서를 비롯한 야권 세력은 스탈린주의자인 체르벤코프를 공격했다. 불가리아 공산당 전원회의는 당수로 지프코프를 선출했지만, 체르벤코프를 숙청하지 않고 수상에서 부수상으로 강등했다. 마찬가지로, 북한 야권 세력의 계획도 김일성을 즉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권력만 박탈하자는 것이었다.
최창익은 김일성의 동유럽 순방을 틈타 준비에 착수했다. 이 순방은 그해 6월 1일 시작돼 7월 19일 끝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동안에 중앙위원들을 포섭해두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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