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 담화가 발표된 날 내각관방부에서 같이 배포된 <위안부 문제 조사 과정과 경위에 대한 조사서>
내각관방부
이 담화를 보면 구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 및 모집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부분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감언이설, 혹은 강요로 당사자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위안부로 강제로 차출했으며 이후 위안부 본인의 의지에 반해 모집, 이송, 관리 등 모든 것을 해당 군의 지휘에 맡겼다는 부분도 나온다.
역사수정주의자들은 고노 담화 발표 당시 미야자와 개조내각 및 고노 요헤이가 정치적으로 친한이고 '리버럴'이라서 이런 게 나왔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이 이런 담화를 발표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고노 담화 1년 전인 1992년 7월 6일에 나온 '가토 담화'이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부터 1년여가 지난 시점에서 당시 가토 고이치 내각관방장관은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조선반도 출신의, 예컨대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작년 12월부터 관계자료가 보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큰 각 정부기관에 대해 정부가 이 문제에 관여했는지 아닌지에 관해 조사를 실시했고 이번에 이 조사결과가 나왔기에 발표합니다. (중략) 제가 요점만 설명 드리자면 위안소의 설치, 위안부의 모집에 해당하는 업자들의 관리, 위안시설의 축조, 증축, 위안소 경영 및 감독, 위안소 및 위안부의 위생관리, 위안소 관계자들의 신분증명서 발급 등에 정부의 관여가 있었다고 인정됩니다.
그리고 가토 장관으로부터 고노 장관으로 이어지는 1년여의 기간 동안 일본정부는 보다 더 넓고 깊게 위안소 및 위안부 실태에 관해 조사했고, 고노 담화가 나온 날 동시에 내각관방내각외정심의실 이름으로 보다 구체적인 조사서 '소위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도 배포됐다. 이 자료를 보면 지금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위안부의 모집' 부분은 이렇게 돼 있다.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 당국의 요청을 받은 경영자의 의뢰에 의해 알선업자가 모집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경우에도 전쟁의 확대와 함께 그 인원(기자주-위안부)의 확보 필요성이 높아져 그러한 상황 하에서 업자들이 감언이설, 혹은 협박 등의 형태로 모집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아가 관헌(官憲)이 직접적으로 이것에 가담하는 케이스도 있었다.
이 때 일본 정부가 조사한 정부기관 및 민간기관은 경찰청, 방위성, 법무성, 외무성, 문부성, 후생성, 노동성, 국공립공문서관, 국립국회도서관, 미국국공립도서관이며, 인터뷰 대상자는 종군위안부, 구 일본군, 조선총독부 관계자, 민간위안소 경영자, 위안소부근의 거주자, 역사연구가 등이었다. 또한 담화 발표 직전인 1993년 7월 26일부터 30일까지 닷새간 한국을 방문해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와 협력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터뷰도 진행했다고 조사서에 밝혀두었다.
한 나라의 정부가 막대한 물량과 인원을 투입해, 그것도 자신들의 감추고 싶은 사안을 밝힐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위안부에 관한 여러 문제는 실제로 존재했으며 고노 담화 이후 28년간 수많은 연구자들의 논문과 자료 등이 추가로 나왔다. 나만 하더라도 2010년 4월 <제이피뉴스> 기자로 재직하던 때 구 일본군 군속 마쓰바라 마사루 씨를 인터뷰 했었다. 그때 그는 '남국료'라는 이름의 위안소 출입증을 보여줬고, 인터뷰를 통해 군 위안소 모집과 관리에 구 일본군이 개입해 있었다는 것을 생생하게, 그림까지 그려가며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