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가을, 영상작업을 생업으로 삼지 않겠다 다짐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목수 일을 하며 지냈다.
배혜원
목수는 적성에도 맞고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비 오는 날엔 일이 없다. 이래저래 공치는 날이 많았다. 마침 친구가 영상 제작지원금을 받을 수 있겠다면서 작업 제안을 해왔다. 목수 일이 없는 날, 카메라를 들고 나가 찍었다. 표류문학의 산실인 제주에서 각기 다른 시기를 산 세 남자의 인생 표류기를 담았다. 조선시대 <표해록>을 쓴 제주 선비 장한철, 제주에 사는 조작간첩 피해자 강광보, 그리고 동남아와 서울을 거쳐 제주까지 오게 된 모로코인 오마르의 이야기를 한데 엮어 <표해록>이란 다큐멘터리로 내놓았다. 2019년 각종 영화제에서 상영이 되었고 최근엔 배급사가 나서서 해외시장에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 정말 아이러니네요. 영상을 안 하겠다고 제주에 내려갔는데 그때 만든 것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전에 꿈꾸던 걸 이루었어요(웃음).
"맞아요. 영화에 대한 이메일이 들어오는 게 저도 신기해요."
- 그래서 이제 다시 영상작업을 해도 되겠다 생각하셨나요?
"영상작업을 하더라도 생업으로 삼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변함없어요."
- 생업으로 하면 뭐가 문젠데요?
"안 해도 될 일을 하게 되고 피사체를 괴롭히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걸 내가 밥 먹는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되겠다 생각해요."
배혜원의 리틀 포레스트
2018년 11월 제주를 떠나 화개로 돌아왔다. 부모님이 겨울에 석 달간 여행을 떠나신다며 "와서 집 좀 보고 개 밥 좀 줘라" 하시길래 "알겠습니다"하고 들어왔을 뿐, 처음부터 길게 눌러살 작정은 아니었다.
-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이름도 혜원인 것 아시죠(웃음)? 배혜원의 리틀 포레스트, 오랜만에 고향 집에 돌아와 지내는 시간은 어땠어요?
"그때의 경험이 제겐 참 특별했던 게, 새삼 '내 삶이 나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성공하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고... 그동안엔 왜 그렇게 다른 사람 시선 속에서 내 입지를 갖고 싶어 애썼을까 싶더라고요. 석 달 동안 아무것도 안 해도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았어요."
- 뭐가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킨 걸까요?
"그제서야 지리산이 좋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집 앞에서 황장산이 마주 보이는데 아침마다 그 산을 보면 마음이 녹더라고요. 그 전에는 한없이 벗어나고 싶은 곳, 성공하려면 벗어나야 하는 곳이었는데, 집에 와서 석 달을 보내다 보니, 산과 자연이 저한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어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너의 속도대로 살라'고. 그 기억이 참 편안하고 좋았어요."
지리산 넓은 자락에 조바심과 초조함을 내려놓을 줄 알게 될 무렵,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졌다. 부모님이 여행에서 돌아오신 며칠 뒤, 동네에 양수댐을 짓는다고 사업설명회를 한다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주민들과 사전 협의도 없는 일방적 통보였다. 부모님은 "여기가 수몰지역이 될지도 모른다는구나"하며 한숨을 내쉬셨다. 이제사 고향 땅에 정을 붙이게 되었는데 그걸 빼앗길지도 모른다니 황망했다.
주민들과 열흘 동안 밤마다 모여 회의를 했다. <하동군 양수발전소 유치 반대대책위>를 결성하고 배혜원이 사무국장을 맡았다. 주민들이 한목소리로 강력히 항의하고 나선 덕에 다행히 발전소 계획은 철회되었다. 배혜원이 "내 삶은 이 일을 계기로 전과 후로 나뉘게 되었다"고 할만큼 그의 인생에선 중요한 전환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