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을 보이콧하면서 우리는 시부모님에게 말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고. 내년부터는 설날에는 시가에만, 추석에는 친정에만 가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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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추석, 나와 남편은 명절을 보이콧하고 호캉스를 떠났다. 두 돌 넘은 아이와 호텔에서 보내는 명절은 육아의 연장이었지만 평화로웠다. 북적이는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근처 인천 공항에서 쉐이크쉑 버거를 먹고, 호텔 룸 창 밖으로 뜨고 지는 비행기를 바라봤다. 결혼 6년째 되던 해였다.
명절을 보이콧하면서 우리는 시부모님에게 말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고. 내년부터는 설날에는 시가에만, 추석에는 친정에만 가겠다고.
설날에는 시가, 추석에는 친정. 단순한 문구 너머에는 지난한 투쟁이 있었다. 결혼하면서부터 명절에 시가 먼저 가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다. 왜 그게 당연했을까. 시가는 원주, 친정은 부산. 명절 연휴에 둘 다 가는 건 힘들었다. 아이 데리고는 더욱더. 어느 시점부터 명절에는 시가에만 갔다. 그것도 너무 당연히.
시가의 명절은 화목했다. 명절 전날, 남녀 모두 함께 명절 노동을 하고 저녁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윷놀이를 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 화목함은 몇 배로 커졌다. 시할머니까지 4대가 모인 집에는 웃음과 행복이 넘쳤다.
시가의 명절이 화목할수록 나는 혼란스러웠다. 양성 평등이니 페미니즘이니 뭐니 했지만 명절에는 당연히 남자 집안 먼저 가서 좋은 며느리 역할극을 반복하는 처지.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는 현실에 자괴감과 모멸감이 밀려왔다. 부산에 있는 부모님도 마음에 걸렸다.
결혼 후 9번의 명절을 보낼 때마다 울지 않은 적이 없다. 그때마다 남편은 말했다. "내가 미안해. 내가 잘할게." 그 말 뒤에는 '그러니까 이번에만 니가 좀 참아줘'라는 말이 숨어 있었다.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건 아이 때문이었다. 불평등한 명절 문화를 아이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명절에 친정에만 가보니
명절을 바꾸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우리는 평등을 말했는데 시부모님은 배은망덕을 말했다. 시부모님은 희생과 헌신의 아이콘이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요지였다. 시아버지는 말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어도 우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시어머니는 시할머니를 40년 가까이 모시고 살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에게 헌신하는 게 당연한 줄 아는 사람들. 시부모님은 선한 분들이었다. 하지만 시부모님이 말하는 평범한 명절을 위해서는 내가 계속 좋은 며느리 코스프레를 해야 했고, 부산에 있는 부모님은 매번 외로운 명절을 보내야 했다. 시가 단톡방을 나왔고 그 후로 다시는 들어가지 않았다. 남편도 나도 시가와 수개월간 교류를 끊고 지냈다. 더는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이듬해 추석, 드디어 결혼 후 처음으로 명절에 친정에만 가게 됐다. 처음에는 마냥 신났다. 드디어 우리 부모님도 딸, 사위, 손자와 함께 명절다운 명절을 보내게 되는구나. 같이 명절 음식도 만들고 즐거운 시간 보내야지.
새벽 3시에 일어나 카시트에 아이를 태우고 8시간 걸려 부산 집에 도착했을 때, 나도 남편도 아이도 이미 녹초가 돼 있었다. 아빠는 출근했고 엄마는 혼자 명절 음식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
다음 날부터는 결혼 전 명절과 똑같았다. 당연히 아빠 본가가 먼저였다. 음식은 엄마와 큰엄마가 다 했는데 차례는 남자들만 지냈다. 엄마 본가에 가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북한 음식, 수많은 그릇, 앞치마를 두르고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며느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괜히 나까지 가족들 데리고 와서 밥그릇 개수 늘린 게 아닐까, 마음이 불편했다. 친척 집만 전전하다 9시간 걸려 다시 서울 집에 돌아왔다.
그제야 생각났다. 나는 어릴 때부터 명절이 싫었다는 걸. 엄마가 기름 냄새 맡으며 하루종일 부엌에 서 있는 것도 싫었고, 남자들은 방안에 앉아 술 마시는데 여자들만 부엌에서 종종거리며 상 차리는 것도 싫었다. 차례상 물리자마자 화투판이 벌어지는 것도 싫었다. '엄마도 엄마 집에 가고 싶을 텐데' 자꾸만 엄마 눈치를 살피게 됐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명절이 좋은 사람은 아빠뿐인 것 같았다.
내 눈에만 보이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