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7월 당사에 출근한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가 김종필, 박태준 최고위원과 손을 맞잡은 모습.
연합뉴스
이런 속에서 그는 대권을 꿈꾸게 됐다. 대선이 있는 1992년에 위의 ROTC 모임에 나가 '신(新)주도세력이 필요하다'는 주제로 국정철학을 역설한 것도 그가 얼굴마담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1992년 3월호 <한국논단>에 게재된 이 연설문에서, 그는 6월항쟁 이후의 민주화로부터 기존 체제를 지키려면 자신과 같은 '산업화 세력'이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처럼 6월항쟁 이후의 시대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서도 그는 산업화 세력과 함께 시대적 과제에 도전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박태준의 열정은 '육사 후배' 노태우에게 부담이 됐다. 노태우는 이종찬·이한동 같은 민정계 유력 주자들과 달리 박태준이 대권에 도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김영삼계(민주계)가 박태준을 무척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1992년 4월 17일 자 <동아일보> 1면 톱기사에 "김 대표(김영삼) 측은 그간 민정계 관리자인 박 최고위원이 출마한다면 대의원 분포상 우열 현상이 뚜렷한 만큼 불완전한 경선이 될 것이라며 그의 출마를 반대"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처럼 김영삼계는 박태준이 출마하면 민정계가 뭉칠 거라는 우려를 품고 있었다.
노태우는 그런 김영삼계를 붙들어두려면 박태준을 묶어둬야 한다고 판단했다. 김영삼계의 탈당을 막지 못하면 민자당은 민정당으로 회귀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신군부 이미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유권자에게 어필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는 그 점을 두려워했다.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김영삼 대표의 입장에서도 이종찬 의원과 대결하는 것은 크게 두려울 것이 없으나 박 최고위원이 나서게 되면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박 최고위원이 출마하게 되면 어떤 돌출 행동이 일어날지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김영삼의 돌출 행동을 막는 길은 박태준을 포기시키는 것뿐이라고 노태우는 판단했다. 노태우는 '6공 황태자'로 불린 박철언(노태우의 부인의 사촌동생)을 내세워 돈줄을 죄는 등의 방법으로 김영삼의 대권 행보를 견제했다. 김영삼의 청와대 입성을 도울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김영삼을 묶어두기는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김영삼이 당을 깨고 나가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으려 했다.
그래서 노태우는 박태준에 대한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박태준은 노태우의 간접 화법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포철 회장으로서 쌓아 올린 박 선배의 명예가 어떤 경우든 손상돼서는 안 됩니다'라는 식의 표현을 박태준은 자기 나름대로 이해했다.
상대방이 자기 뜻을 이해하지 못하자, 노태우는 김종필에게 부탁을 했다. 노태우와 달리 김종필은 직접 화법을 구사했다. 1997년 5월 12일 자 <경향신문> 기사 '비록(秘錄) - 문민권력 탄생 막후'에 따르면, 한 살 많은 김종필은 "(대통령은) 박형보다는 김 대표를 속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태준은 약간 당황해하면서도 도리어 면박을 줬다. "김 선배, 제가 알기에는 다릅니다"라며 "정치를 30년이나 했다는 분이 그 정도도 감을 잡지 못하고 계십니까? 그동안 정치를 헛하셨구만요"라고 그는 답했다.
결국 노태우는 안기부장을 동원했다. 제목이 '박태준 씨 불출마'인 위의 <동아일보> 톱기사에 따르면, 1992년 4월 16일 박태준은 이상연 안기부장으로부터 2시간이나 설득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결정타가 되지 못했다. 결정타를 날린 쪽은 안기부장 특보였다. 그날 밤 이대공 포항제철 부사장을 만난 손진곤 특보는 '출마하면 항명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 대통령의 의지임을 명확히 전달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박태준은 17일 오전에 정해창 대통령비서실장을 만나 대통령의 의중을 한번 더 확인한 뒤 불출마 방침을 확정했다.
그가 출마 강행했다면
박태준의 불출마는 김영삼을 민자당에 붙들어두는 데 기여했고, 이는 민자당이 신군부 정당의 본색을 가리고 보수 대연합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김영삼 후보 선거대책위원회가 출범하기 4일 전인 1992년 10월 9일 박태준이 탈당계를 제출하기는 했지만, 이때는 김영삼이 민자당을 이미 장악한 뒤였다.
만약 박태준이 출마를 강행했다면, 김영삼은 '불공정 경선이 예상된다'며 당을 깨고 나갔을 가능성이 있다. 그랬다면 신군부 정치세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상당히 다른 길을 걸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박태준은 '대통령 후배'의 내심을 뒤늦게 확인한 뒤 마음을 고쳐먹었고, 이에 힘입어 신군부 정당은 김영삼계를 끌어안고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이는 신군부 정당이 떠받치는 한반도 냉전 구도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당을 박차고 나간 박태준은 그 뒤 시련을 겪었다. 포항제철이 그해 11월에는 감사원 감사를 받고, 이듬해 2월에는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았다.
그 본인도 비자금 문제로 수사를 받았다. 1995년 8월 11일 검찰이 공소를 취소하기 전까지 박태준은 살얼음을 걸어야 했다. 그 뒤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에 입당해 총재가 되고 김대중 정권 때 국무총리가 된 그는 2011년에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