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선의 웃음북한산 산자락에서
민병래
세상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안정선은 올해 예순이 되었다. 그가 '아동공동생활가정'을 꾸려오면서 2003년은 중요한 해였다. 정부는 그해 아동정책 방향을 대형시설 중심이 아닌 소규모 양육으로 전환했다.
1953년 휴전 후 수만 명에 달하는 전쟁고아를 수용하기 위해 대형시설이 불가피했다. 이런 유래로 대형기관은 아동보호시설의 큰 축이었다. 하지만 이들 시설에서 발생하는 이른 바 '시설병'은 숙제 거리였다.
학계와 UN도 개선을 권했던 때여서 정부는 아동복지법을 개정하고 요셉의 집 같은 가정을 '시설'로 인정하고 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수용'에서 '가정과 같은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정책방향을 바꾼 것이다.
이 전환에는 은총의 집 사례가 큰 모범이 되었다. 보건사회부 정책담당자들이 수차례 현장 조사를 나왔다. 이에 따라 하나의 시설에는 어른 2~3명 아이들은 7명까지, 면적 기준도 정해지고 또 대표나 종사자들에게 최저임금 수준이나마 인건비를 지급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안정선과 김은미도 처음으로 '월급'이란 것을 받아보았다. 처음에는 시설당 1명 인건비만 인정해 함께 있는 이들과 나눠 썼지만 지금은 3명까지 지급되는 것으로 개선되었다.
안정선은 이제 새로운 모색을 한다. 요셉의 집에서는 65살까지만 일할 수 있다. 안정선보다 네 살 위인 김은미는 2022년이면 은총의 집을 떠나야 한다. 국가가 시설로 지위를 부여하고 인건비를 지급하면서 종사자의 연령 상한을 정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그는 숟가락 하나 더 놓아서 아이들을 돌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 꿈을 이제는 정부가 끌어안고 간다. 세상은 그렇게 변했다. 안정선은 비록 요셉의 집은 떠나게 되더더라도 세상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더 많은 일, 더 큰 일을 찾아나서고자 준비하고 있다.
93년 영월 산골에서 조팝나무 화관에 가락지 하나로 연을 맺은 김은미도 그 길에서 물론 함께 할 것이다. 아니, 이번에도 결혼식 다음 날, 새벽이슬에 젖으며 아이들을 돌보러 떠났던 김은미가 앞서가고 안정선은 뒤미처 따라갈 것이다.
못다 한 이야기
① 안정선이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교리 공부를 하고 영세를 받았는데 그때 세례명이 스테파노와 세반스찬 두 개가 내려왔다. 선배가 먼저 스테파노를 택해 그는 할 수 없이 세바스찬으로 정했는데 알고 보니 이 분이 '청소년 수호성인'이었다. 지금껏 걸어온 이 삶은 고등학교 때 이미 정해져 있었던 모양이라고 안정선은 우스개소리를 한다.
⓶ 요셉의 집이나 은총의 집과 같은 '아동공동생활가정'은 전국 400여개에 이른다. 이들 시설에는 평균 3명 정도가 근무한다. 문제는 아이들만 따로 재울 수가 없어 24시간 365일을 같이 생활한다. 이곳 대표나 선생님 들은 휴일도 명절도 챙길 수 없는 상황. 그렇다면 기본급은 최저임금이더라도 호봉제 도입과 시간외수당과 같은 각종수당이 현실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를 도입하는 곳은 서울시 정도이고 나머지 지자체는 아직 지지부진하다. 또 여기에 소요되는 재정이 복권기금에서 충당하고 지급명목도 일자리 창출이며 기재부에서 최소 예산만 배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안정선은 "아이들을 돌보는 어른들이 행복해야 아이들과 '따뜻한 관계'가 가능하다"는 소신으로 정부정책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선 바가 있다. 2014~2019년 한국아동청소년그룹홈협의회(http://www.grouphome.kr)의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제도개선을 위해서 노력했다.
③ 요셉의 집에는 매월 60만원 30년째 기부하는 얼굴없는 천사가 있다. 이런 후원이 요셉의 집이나 은총의 집처럼 초기 '아동공동생활가정'이 버텨오는 힘이 되었다.
④ '시설병'은 흔히 아동인권침해나 학대 등의 문제와 그렇게 양육한 아이들이 시설보호가 종료된 이후에도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아 생긴 말이다.
안정선의 B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