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철원군 월정리역에서 찍은 후고구려(태봉) 도읍지 안내문.
김종성
역사학자 겸 독립투사 신채호는 위와 같은 행적들과 더불어 궁예의 혈통이 그를 폄하하는 데 활용됐다고 해석한다. 왕건이 쿠데타를 합리화하고자 궁예의 혈통과 행적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신라 왕실의 피를 타고난 궁예가 신라 왕실에 적대했다는 점을 근거로 궁예가 배신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고 신채호는 풀이한다.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는 이렇게 말했다.
고대의 편협한 윤리관 아래에서는 헌안왕의 초상화를 모독하고 신라에 불충한 두 가지만으로도 궁예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런 궁예를 죽이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라는 논리가 나온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왕건은 살아서 고려왕이 되고 죽어서 태조 문성(文聖)의 시호를 받아도 추호도 부끄러움이 없게 되는 것이다.
왕건과 고려인들이 궁예에게 배신자 이미지를 씌운 일을 생각하면서 신채호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것이 있다. 궁예가 실제로는 왕족이 아니었는데도 왕건이 그렇게 조작했을 수 있다는 추론이다.
왕족도 똑같은 인간이므로 특별 대우할 필요는 없지만 인류는 오랫동안 그들을 신성시했다. 여기에는 종교 성직자들의 역할도 큰 몫을 했다. 제정일치를 벗어나 정교분리가 이뤄진 시대에도 종교는 왕실을 신성화하는 데 참여했다. 군주는 하늘의 대리인이라는 이미지가 종교의 협조로 더 쉽게 확산됐다.
그래서 군주들은 지금의 대통령 이미지뿐 아니라 신의 이미지도 상당 부분 갖고 있었다. 군주가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설령 폭군이라 할지라도 군주를 시해하거나 배신하는 것을 고대인들은 꺼렸다. 고대인들은 군주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더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고려왕조의 녹을 먹던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 과정에서 공양왕을 비롯한 왕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이성계를 지지했던 개혁 세력인 신진사대부의 일부가 지지를 철회하고 중앙 정치에 등지는 주요 요인이 됐다.
군주를 배반하는 것에 대한 꺼림칙함은 왕조시대가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20세기에도 여전히 나타났다. 박정희가 윤보선 대통령을 어쩌지 못하고 전두환이 최규하 대통령을 어쩌지 못한 데는 그런 전통적인 관념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김재규의 거사가 유신체제 종식에 크게 기여했는데도 그에 대한 평가가 좀처럼 바뀌지 않는 데는 그와 박정희의 인연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그가 그날 궁정동 안가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사람이었다면 그에 대한 평가가 확연히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군주와의 의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왕조시대의 낡은 유물이다. 그것은 대중의 정치적 이익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그런 기준으로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궁예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궁예가 배신자 이미지를 갖게 된 것도 실상은 그의 책임이 아니다. 그를 그런 운명으로 내몬 것은 신라 왕실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 점을 고려해주지 않았다. 그가 신라 왕실의 피를 물려받고도 신라 왕실에 대항했다는 점만을 크게 중시했다.
궁예 왕조가 대대로 이어졌다면 평가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신라 왕실과의 인연을 등지고 신라 왕실에 대항했다는 점은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떨어뜨렸다. 비합리적이기는 하지만 인류가 의리 문제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같은 관념으로 인해 그는 죽은 뒤에도 동시대 경쟁자들보다 낮은 평가를 받게 됐다.
애초부터 군주와 인연이 없었던 사람이 혁명을 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봐줄 수 있지만 인연이 있는 사람이 군주에게 대항하는 것은 웬만해서는 긍정적으로 봐주지 않는 것이 인류의 오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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