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만난 권인숙 의원(좌)과 이진순 와글 이사장(우)
권인숙의원실
지난 16일 국회의원 회관으로 그를 찾아갔다. 의원실 한쪽 벽면을 빼곡이 채운 서가 때문일까. 의원실이라기보다는 교수 연구실처럼 보이는 공간이었다.
- 제가 가 본 의원실 중에 책이 제일 많네요.
"갖다 놓을 데가 없어서요. (웃음) 버리고 골라내야 하는 건데. 그 정신도 없어서..."
- 요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낙태죄 개정안 얘기부터 시작할까요? 정부 개정안 입법예고가 나온 게 10월 7일인데, 닷새 만에 바로 전면 폐지 개정안을 내놓으셨어요. 정부 개정안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두신 건가요?
"제가 국회의원이 되면서부터 낙태법은 제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전에 법무부장관도 만나고 여당 의원들도 만났어요. 법무부장관도 폐지 의견에 동의하시고 법무부 양성평등위원회도 낙태죄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권고를 해서 의견을 모으는 과정이었는데..."
- 그런데 왜 이런 정부안이 나왔을까요?
"보건복지부나 정부 부처에는 '균형'이란 개념이 강하게 작용해요. 한쪽에는 여성, 한쪽에는 종교계나 이런 쪽 의견을 놓고 균형을 맞춰 안을 만들려고 하죠. 문제의 직접적 당사자는 10대부터 40대까지 여성들인데 그들의 목소리를 (종교계 등과) 등가로 보려는 하는 기계적 균형이 문제죠. 입법 예고가 가능한 시기까지 어떻게든 합의를 보면서 내놓으려고 하다 보니까 졸속적인 안이 나온 게 아닌가 싶어요."
- 이번에 공동발의자로 참여하신 분들을 보니 민주당 내에 여성계를 대표한다고 하신 분들도 많이 빠져있고 남성 의원은 한 명도 없어요.
"빨리 입법 발의를 하기 위해서 알음알음 이야기 나눈 분들과 서둘러 안을 낸 거고요, 공동발의자에 이름은 안 올렸지만 적극적으로 돕는 분들도 계세요."
- 그런데 왜 민주당 당론으로 정하질 못합니까?
"정부안이 나왔으니까요. 민주당으로서 그건 불가능해요."
- 지금 당내 중론은 어떻습니까?
"일단 정부안이 나오면 정부안으로 많이 기울게 되죠. 부처간에 조정이 된 안이니까. 그러긴 해도 법사위에서 어떻게 다뤄지느냐가 중요한데 정부안이 나오고 나서 여성계의 반발이 강력하고 국회 청원에도 10만 명이 참여했잖아요. 정부안 그대로 가기도 쉽지 않겠구나 하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어요.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기계적 균형론도 조금씩 깨지는 것 같고요."
- 지난해 4월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낙태죄에 대한 여론이 최근 10년 사이 크게 변화한 걸 볼 수 있어요. 2010년에 34대 53으로 낙태죄 유지 여론이 높다가 2019년엔 58대 30으로 폐지론이 크게 앞질렀죠.
"지난해에 헌법재판소에 법무부가 낸 변론요지서만 해도, 낙태를 원하는 여성에 대해 '성교는 하되 책임지지 않으려는 사람'으로 규정해서 '문란한 성'의 문제로 몰아가기도 했는데, 작년에 이어서 제대로 된 공론화과정을 거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지금까지 전 세계 중에 우리처럼 낙태를 둘러싼 논쟁을 제대로 안 한 나라는 없을 거예요. (웃음)"
낙태죄 정부 개정안은 사문화된 법에 날개 달기
그간 우리 사회는 공정한 논쟁을 뒷받침할 객관적 자료조차 제대로 확보해 놓지 못했다. 2011년 이후 7년 만에야 실시된 2018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가 현재로선 가장 최근의 것인데, 만 15세~44세 여성응답자 1만 명 중 임신중절 평균 연령은 28.4세, 평균 횟수는 1.43회, 전체 임신여성의 19.9%가 임신중절을 경험했다고 집계됐다.
임신중절 이후 적절한 휴식을 취했다는 여성은 47.7%에 불과하고 54.6%가 죄책감, 우울감, 자살충동 등 정신적 증상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주제의 민감성 때문에 정확하게 답변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혼의 저연령층 여성의 현실은 이보다 더 심각할 것으로 추정된다. 낙태죄 형법조항을 개정해야 한다는 의견은 75%, 가장 큰 이유는 '인공임신중절시 여성만 처벌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 지금 정부안의 한계는 뭐라고 보십니까?
"가장 큰 문제는 사문화된 낙태죄를 다시 살려내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에요. 형법은 원래 아주 엄격하고 한정적인 법이라서 엄정하게 지켜지도록 만들어지는데, 숙려제니 상담확인서니 임신 주수에 따른 규정 같은 걸 줄줄이 붙여놔서 형법이 아주 길게 늘어났어요. 임신 주수라는 것도 명확한 측정이 쉽지 않은 불명료한 개념인데 온갖 모호한 것들을 다 붙여놔서 오히려 사문화된 법을 다시 살아나게 만들었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퇴행이에요."
- 임신 주수라는 게 정확하게 딱 측정이 되기 어렵다는 걸 모르나요? 특히 생리가 불규칙한 사람들은 임신여부를 확인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리는데.
"청소년들이 제일 문제가 되는데 청소년들은 자기가 임신한 것도 잘 모르고 아니겠지 하다가 24주를 넘기는 게 드문 일이 아니에요. 청소년 입장에서, 낙태를 범죄라고 규정할 때와 범죄가 아니고 사회가 의료 행위로 받아들여 줄 때 언제 더 빨리 주변에 의논하고 처리할 수 있겠어요? 근본적으로 여성의 임신중지를 국가가 범죄로 다루는 것 자체가 문제죠."
- 낙태반대자들은 태아의 생명권을 주장합니다.
"생명권을 지켜가는 방식은 여성의 삶과 건강권에 토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성의 선택과 결정을 잘 지지해 주는 것이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죠."
실제로 미국 거트마커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낙태를 금지하거나 산모의 건강이 위급한 경우에만 낙태를 허용하는 국가의 낙태율이 천 명당 37건인데 비해, 낙태를 대체로 허용하는 국가는 34건으로 나타났다. 낙태허용이 낙태율을 높일 거라는 반대론자들의 주장과는 다른 결과이다. WHO 통계에도, 안전하지 않은 낙태가 전 세계 산모 사망 주요 원인 중 3위를 차지하며 이로 인해 장애를 얻는 경우도 500만 건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것은 낙태가 아니라 여성의 몸을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 국가 제도라는 주장이다.
나는 '권양'이 아니라 권인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