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과 부모 눈물의 상봉한센병 환자와 자녀가 면회하는 모습. 병사지대 환자에게서 자녀가 태어나면 전염을 우려해 직원지대에 있는 미감아보육소에 격리시키고 부모와 자녀들의 면회는 한 달에 한 번씩만 허락하였다.
소록도병원
일본 지배를 거치면서 한센병 환자는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죄수의 이미지까지 갖게 됐다. 이들은 가혹한 대우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로 격하됐다. 이들을 사실상 죄인 취급하는 현상이 일제강점기 때 등장했던 것이다.
한센병에 대한 일제의 대응은 대중의 공포심을 한층 더 자극하는 요인이 됐다. 그 이전에도 한센병은 기피의 대상이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훨씬 더한 공포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이는 20세기 한국인들이 한센병에 대해 과도한 공포심을 품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2010년에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3권 제1호에 실린 한순미 전남대 연구교수의 논문 '나환과 소문, 소록도의 기억'은 "나환은 근대 이후 갑자기 생긴 질병이 아닌데도, 일제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공포감을 주는 사람들로 이미지화되고, 그들은 우선적으로 척결해야 할 관리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고 설명한다.
미나미는 '스오 원장 이하 직원 및 환자 일동이 고락을 같이하려고 일생을 바치고 있다'라고 말했다. 스오 마사스에 원장은 3년 뒤인 1942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57세였던 그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었다. 환자 이춘상이 갱생원의 학대에 불만을 품고 벌인 일이었다. 원장 이하 직원과 환자 일동이 고락을 같이하는 모습은 소록도갱생원에서는 없었다. 그곳에서 원장 이하 직원은 교도관이고 환자들은 죄수일 뿐이었다.
조선과 다른 일제
위의 <세종실록>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한센병 환자들을 죄인이 아닌 환자로 대우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의 병을 치료하는 문제뿐 아니라 주거·의복·식량·목욕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 이들을 돕는 승려나 의생들에게 혜택을 주는 방안도 검토했다. 또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환자들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또 숙종 11년 8월 4일 자(1685년 9월 2일 자) <숙종실록>에는 나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화장한 정득춘에 대한 조선 정부의 반응이 소개돼 있다. 정득춘은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시신을 불에 태웠다. 병의 전염을 막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정득춘의 의도 여하에 관계없이 조선 정부는 그를 흉악무도한 불효자로 규정했다. 이는 한센병 환자도 자녀의 효도를 받아야 하는 똑같은 인간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한센병 환자에 대해 강제단종이나 임신중절을 서슴지 않았던 일본제국주의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한국인 통제하려는 의도
그런데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식민당국의 대책에는 또 다른 의도가 담겨 있었다. 환자들뿐 아니라 여타 한국인들까지 차제에 함께 억누르겠다는 의도가 그것이었다. 식민지 한국인들의 일상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명분을 한센병 대책에서 찾았던 것이다.
위의 한순미 논문은 "일제 위생경찰은 과학과 집단의 생명을 내세우며 식민지 권력이 모든 조선인의 몸과 생활을 통제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했다고 설명한다. 한국인들의 일상에 합법적으로 개입하고자 한센병 예방 및 관리를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일제는 그런 의도로 한센병 정책을 추진하고 소록도를 관리하면서도 자신들의 행위를 지상낙원 건설로 자찬했다. 이웃과 이웃이 평화롭게 지내는 인류 최고의 행복이 소록도에서 구현되고 있다고 선전했다.
20세기 한국인들에게는 소록도가 한센병이라는 말과 함께 연상되지만, 실제로 이곳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정책'이라는 말과 함께 연상돼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소록도는 일본제국주의의 거짓 식민정책을 폭로해주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