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조봉암 대통령 후보 벽보와 이범석 부통령 후보의 벽보.
국가기록원
제3대 대선 열흘 전인 1956년 5월 5일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호남행 열차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유행가 '비 내리는 호남선'을 국민 애창가로 만든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많은 국민들은 경무대의 이승만 쪽으로 의혹의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이승만에 대한 분노가 커졌지만, 민주당은 이승만을 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민주당은 '우리는 지지하는 후보가 없다'라며 투표용지에 여전히 이름이 적혀 있는 신익희를 찍도록 유도했다. 조봉암 쪽으로 갈 수도 있었던 표들이 이로 인해 무효표가 됨에 따라 조봉암이 받은 216만 3808표에 근접하는 185만 6818표가 무효표가 됐다. 민주당이 이승만 견제가 아닌 조봉암 견제에 나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민주당은 그 이전의 한국민주당 때는 친일 청산과 분단 반대라는 국민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 열망을 부분적으로 계승한 조봉암을 돕지 않은 민주당의 태도는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인기 없는 대통령이었다. 그런 인물이 70% 이상을 득표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개표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다. 1957년 5월호 <신태양> 별책에 기고한 '나의 정치백서'에서 조봉암은 "항용 말하는 것처럼 투표에는 이기고 개표에는 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심지연 경남대 교수의 <한국 정당 정치사>는 박기출 전 신민당 국회의원의 <한국 정치사>를 인용하는 대목에서, 조봉암 측 관계자의 개표장 입회를 막는 방법으로 "(이승만 정권이) 조봉암의 표를 크게 줄이는 한편, 이승만의 표는 불려놓는 상투적인 수법을 동원해 이승만의 당선을 날조했다고 (박기출이) 주장했다"라면서 "만일 공정한 투개표가 이루어졌다면 조봉암의 표는 6백만 표를 넘고 이승만의 표는 1백만 표 전후가 됐을 것"이라는 박기출의 추정을 소개했다.
개표가 공정했다면 조봉암이 제3대 대통령이 됐을 수도 있다. 그런 영향력을 가진 조봉암이 1950년대 두 차례 대선에서 이승만과 경쟁했다. 진보파인 그가 국민적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은 해방 정국과 1960년대뿐 아니라 1950년대에도 진보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상당했음을 반영한다. 그런 조봉암이 풍미한 시대라는 점에서 1950년대는 우울한 잿빛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 역동적인 도전의 이미지로 기억될 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제3의 노선
조봉암은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듬해인 1898년 9월 25일 강화군 선원면에서 출생했다. 강화공립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뒤 군청 사환, 면서기, 대서사 보조원 등을 거친 그는 1919년 3월 18일 만세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1920년에 서울로 간 그는 YMCA 중학부에 다니던 동안에도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돼 2주간 구속됐다.
23세 때인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고학생의 삶을 살았다.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의 '죽산 조봉암' 코너는 "엿장수를 하며 세이소쿠 영어 학교에 입학하고 주오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라고 말한다.
그 뒤 그는 무정부주의 독립투사를 거쳐 공산주의 독립투사로 자신을 단련시켰다. '자본주의의 극단적 형태인 제국주의 일본에 저항하려면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사상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논리적 토대에 입각한 선택이었다.
1922년부터 그는 중국과 러시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조직과 외교활동에서 특히 두각을 보였다. 그러던 중 34세 때인 1932년 상하이에서 체포돼 한국으로 압송된 뒤 지독한 고문을 받았고, "고문으로 상한 손가락 7개를 동상으로 잃어야 했다"고 '죽산 조봉암' 코너는 말한다.
1939년(41세) 7월 석방됐다가 1945년(47세) 1월 구금된 조봉암은 그해 8월 15일 석방된 뒤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했다. 그 뒤 그는 사상적 변모를 보인다. 1946년 7월부터 노동계급의 독재도 반대하고 자본계급의 전제(專制)도 반대하는 제3의 노선을 천명한 것이다.
'나의 정치백서'에서 그는 "나는 <삼천만 동포에게 격함>이라는 작은 책자를 내어서 공산당과 극우파들의 반민족적인 정치 행동을 규탄하고 민족자주의 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자주적 입장에서 독립운동이 계속되어야 할 것을 강경히 주장"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