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저널리즘으로서의 SNS

검(檢) 위의 말(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만 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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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jiakim3532)등록 2020.11.21 12:04
프리드리히 니체는 "모든 인식은 해석"이라 했다. 이 말은 그의 '관점주의'를 대변한다. 예전에 언어학도로서 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이 세계는 모든 것이 '해석학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그 모든 대상을 욕망에 맞게 해석하는 과정이었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은 '사실 보도'다. 하지만 니체의 관점주의적 사유대로라면 '사실 보도'는 틀린 말이다. '사실'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이 보도되는 순간 그 '사실'에는 이미 기자의 관점이 투영된다. 더 이상 '순수한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기자의 관점에서 일단 한 번 해석을 거친 기사를 읽는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그들 자신의 삶에 기반한 '전이해(혹은 무의식)'를 통해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형성한다. 이는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가 왜곡될 여지가 얼마나 큰지를 반증한다. 기자의 역할이 그만큼 중차대하다는 말이다. 

가장 중립적 위치에서 '사실에 최대한 근접한 보도'를 위해 노력해야할 기자들 사이에 '힘에의 의지'가 작동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라. '권력'일수도 있고 더 원초적으로는 '자본(돈)'일수도 있는 그러한 '힘'에의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공정한 언론의 모습은 기대하기 어렵지 싶다. 

나는 요즘 기존 질서의 힘 있는 자들을 위해 법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회의가 든다. 특정 의도 아래 무차별적으로 짜깁기된 헤드라인만으로도 '만고의 죄인'이 양산되는 이 현실은 또 어떤가. 사람들로부터 한 번 찍힌 낙인은 지워지지 않는다. 바로 언론에 의해 집행된 무기징역인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검찰에 분노하다가도 그 진실을 호도하는 언론에 절망하게 되는 이유다. 

내 담벼락에 올라온 한 페친의 'SNS에 대한 나의 생각'을 묻는 질문을 보고 생각을 해봤다.  SNS는 아직도 내게는 양가적 감정을 갖게 하는 공간이 맞다. 하지만 요즘 페북을 둘러보며 드는 생각은 SNS는 집단 지성의 힘이 모아지는 곳이라는 것이다. 뛰는 검찰 위에 나는 언론을 보며 저널리즘에 실망한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글을 쓰고 여론을 형성하는 곳 말이다.

헤겔의 법철학 서문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든 뒤에야 날아오른다"는 말이 있다. 어떤 상황이 마무리되고 그 실체가 정확히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기엔 지금 현실이 너무도 심각하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이 말을 비판하며 '갈리아의 수탉'을 소환하기도 했다. 멀찌감치 서서 고뇌에 빠져 있는 지식인의 표상인 부엉이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게다.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갈리아의 수탉'이 되어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검찰개혁을 선도해나가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건 우리 언론과 시민이 하나로 똘똘 뭉쳐 검찰개혁을 통해 공정한 법치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언론이 할 수 없다면 우리 시민의 힘으로라도 그 길은 반드시 가야만 한다.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모두가 더불어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노력들이 이 공간 곳곳에 존재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보며 위로받기도 한다. 갈수록 고독한 삶이 당연시 되고 있는 비대면의 사회에서 이렇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걱정해주고 축하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게 비록 가상공간에서일지라도 말이다. 

부디 이곳에서 우리가 꿈꾸는 좋은 세상을 위한 희망의 꽃이 피어났으면 좋겠다. 그 숱한 우려와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SNS의 순기능을 떠올리려고 애쓰는 건 바로 이 눈물 나는 개인적 바람 때문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개인적으로 SNS를 좋아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가야만 하는 검찰, 언론개혁의 길에서 반드시 쓰임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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