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1월12일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무장관이 대일 청구권 문제를 타결지을 당시 작성된"김-오히라 메모"원본.
연합뉴스
이 용어에 대한 거부감은 1962년 10월 16일 자 <경향신문> '독자의 광장'란에 실린 독자 투고문에서도 접할 수 있다. 투고의 주인공은 지금은 서울 종로구에 속해 있지만 당시에는 서울 동대문구였던 창신동의 김을수였다. 그는 '청구권 문제에 양보 말자'는 글에서 "우리는 그 지긋지긋한 일제의 착취와 민족압살정책의 구원(舊怨)을 잊고 국교의 정상화라는 대국적인 견지에서 회담에 임해 왔었다"라고 한 뒤 이렇게 말했다.
그 액수도 말이 안 되지만, 독립축하금이니 무상원조니 하여 차마 용서할 수 없는 이름을 붙여 섬나라 근성의 체면치레를 하려 한다. 우리는 그 가증한 간계를 이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
이어지는 부분에서 그는 "경제협력이니 대한(對韓)차관이니 하는 말도 듣기 싫다. 반세기에 걸친 침략의 소행을 한민족은 잊을 수 없다. 일제가 살해한 우리 동포의 생명, 피에 대한 보상은 무엇으로 하겠다는 말인가?"라며 분개했다.
보름 전에 나온 9월 29일 자 <동아일보> 1면 하단의 '횡설수설' 코너는 더욱 더 직설적인 방식으로 비판을 가했다. 이 코너는 "더구나 우스운 것은 청구권에 의한 보상 대신 독립축하금으로 지불하겠다는 도깨비 용어까지 내세운다는 사실이다"라며 이렇게 비판했다.
청구권은 우리가 정정당당하게 요구할 권리, 무상공여나 독립축하금은 '희사의 혜택'을 우리에게 베푼다는 것. 금액의 얼마는 둘째 치고 전혀 의취(意趣, 함의)와 성질이 다르다. 전자는 36년 동안 우리의 고혈을 착취한 변상금으로 '내놓아라' 하는 권리의 주장, 후자는 '앗다, 보태 써라' 하는 선심의 시혜! 거기엔 양편이 권리도 의무도 모두 없다. 주면 주고 안 주면 안 주는, 마음 내키기에 따라 자유재량에 달렸다. 또한 '내라'고 할 이유도 조건도 붙을 수 없다.
제1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이 열린 것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10월 20일이다. 본회담은 4개월 뒤인 1952년 2월 15일 열렸다. 그래서 1962년은 한일회담이 개시된 지 1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일본은 1961년까지의 6차례 회담을 통해서도 한국을 많이 자극했다. 하지만 독립축하금 수준의 모멸적인 언사까지는 쓰지 않았다. 한국을 자극하면서도 한국의 눈치를 살폈던 것이다.
돌변한 일본
그랬던 일본이 1962년을 전후해 달라졌다. 문제의 용어도 이때 등장했다. 용어의 출처는 오히라 마사요시가 대신으로 있는 외무성으로 추정됐다. 1962년 9월 6일 자 <동아일보>의 도쿄 특파원 기사인 '10년 교섭도 모자란가?'는 이렇게 보도했다.
요즘 일본의 몇 중앙지(紙)들은 독립축하금이라는 용어를 곧잘 사용한다. 이 새 용어의 원천지는 일본 외무성인 것으로 믿어지며, 청구권의 존재를 젖혀놓고 자주 사용된다.
독립축하금 용어가 등장하는 시기에 일본의 태도도 현저히 달라졌다.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한국에 대한 노골적 자극을 서슴지 않았다.
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쌍방 합의가 없으면 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발언함으로써, 청구권으로 해줄 것이냐 말 것이냐가 자국의 의중에 달려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일도 있었다. 또 일본 정부가 자국 어선들의 한국 침입에 대해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하는 일도 있었다. "과거 같으면 한·일 양국은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엔 서로 상대방을 자극할 만한 발언과 행위를 삼가"했다면서 위 기사는 일본의 달라진 태도를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