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가 2007년 7월 16일 오전 여의도 캠프에서 자신을 지지한다고 선언한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와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는 2002년에는 노무현을 지지하고 2007년에는 이명박을 지지했다. 한나라당 창당과 결이 다른 이 두 가지 사건의 공통점이 있다. '될 사람을 밀었다'도 공통점이 되겠지만, 개인적 연고로 정치적 선택을 내렸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꼬마 민주당 때의 노무현과의 인연, 포항과 고려대를 매개로 한 이명박과의 인연이 그런 선택을 추동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됐다. 그는 상당 부분은 개인적 연고에 기초해 2002년에는 진보 후보를 밀어주고 2007년에는 보수 후보를 밀어줬다. 정치 행보의 원칙이 실종된 것이다.
1996년 이후로 그가 그렇게 된 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인연이 있다. 이 인연의 또 다른 주인공이 그를 그 방향으로 의도적으로 이끌지는 않았다. 그 인물과 부딪히면서 그의 인생이 그렇게 흘러갔을 뿐이다. 1990년판 보수대연합인 3당 합당으로 일대 위기에 빠진 야권을 구하고자 이기택과 손을 잡은 김대중이 인연의 다른 쪽 당사자다.
"이기택처럼 고집 센 사람 처음 봤다"
이기택과 김대중의 조합은 1990년의 위기로부터 야당을 건져내는 데 기여했다. 가깝게는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사실상 승리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멀게는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이 승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래서 이 조합은 평화적 정권교체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한국 현대사에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 객관적 성과 속에서도 이 조합은 많은 갈등을 드러냈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대부분 김대중을 겨냥한 이기택의 선제적 자극에서 비롯됐다. 이기택은 김대중의 1992년 대선운동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러면서도 김대중을 상대로 기질적인 이질감을 많이 느꼈다. 이것이 이기택이 김대중을 자극하도록 한 원인이 됐다.
작고 1년 뒤에 나온 회고록 <우행, 내 길을 걷다>에서 이기택은 "애초부터 김대중씨와의 동거가 순탄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라면서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강한 야당을 만들기 위해 통합은 했지만, 그분과는 정치적 기반이나 스타일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너무 달랐다"며 '너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김대중과의 차이를 강조했다.
순탄치 않게 보였던 동거가 그럭저럭 유지된 것은 김대중과 동교동계(김대중계)의 양보 덕분이었다고 이기택 자신도 인정했다. "김대중씨가 양보를 많이 한 편이었고, 동교동계 의원들도 협조를 잘해줬다"고 말했다.
이기택은 김대중이 자신의 색깔을 받아주기를 원했다. 13세 많은 나이를 포함해, 여러 면에서 만만치 않은 김대중을 상대로 이기택은 자기 의지를 관철하려 애썼다. 김대중이 양보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내가 정치 시작한 후 지금까지 이기택처럼 고집 센 사람 처음 봤다"는 김대중의 한탄이 이기택의 귀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이기택이 김대중을 자기에게 맞추려 한 데는 자신감도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92년 대선에 대비한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이기택이 김대중을 이기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기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김대중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회고록에서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라며 "김대중씨가 대세인 것을 부인할 순 없지만, 원래 선거란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한 뒤 "경선 과정에 돌입해보니 의외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만약 이기택이 '김대중은 내가 넘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면, 김대중-이기택 공동대표 체제는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수도 있다. '의외로 해볼 만하다'라는 이기택이 공동대표로 있었기에, 당시의 민주당이 김대중의 의도와 다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