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해외사업추진위원회에 배석한 이건희 회장.
삼성 제공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78세를 일기로 25일 세상을 떠났다. 2014년 5월 10일 호흡 곤란과 심장마비 증세로 병상에 누운 지 6년 5개월 만의 일이다.
그간 삼성이 이재용 부회장 중심으로 운영돼 왔기 때문에 이건희 회장의 별세가 당장에 커다란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의 체제가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또 상속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한층 더 국민의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 체제는 이병철 체제, 이맹희 과도 체제, 이건희 체제에 비해 취약하다. 그룹의 규모나 세계적 위상과 달리 그룹 총수의 정통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위태롭다.
지난 4년간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 총수로서보다는 국정농단 및 불법승계 당사자로 세상에 더 많이 비쳤다.
명(明)
창업자 이병철 초대 회장의 3남인 이건희는 일제강점기 막판인 1942년에 출생해 연세대 상학과 및 와세다대학 경제학과를 거쳐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경영학 석사를 수료한 뒤 삼성그룹에 입사했다. 이때가 1966년 24세 때 일이다.
그 뒤 37세 때인 1979년에 그룹 부회장이 되고 1980년에 중앙일보 이사가 되고 1981년에 한일경제협회 부회장이 됐다. 이렇게 차기 총수의 지위를 굳혀나간 그는 1987년 11월 아버지의 별세로 그룹 총수직을 잇게 됐다. 6월항쟁으로 '87체제'에 들어선 직후 '이건희 체제'가 출범한 것이다.
아버지의 창업을 발판으로 이룩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건희 시대에 삼성은 비약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1993년에 29조 원이었던 그룹 매출액이 그가 쓰러지기 직전인 2013년에는 380조 원으로 급증했다. 대한민국 정도 되는 국가의 1년 예산과 맞먹는 매출액을 올리는 초대형 기업이 된 것이다.
20년간의 화폐가치 변동을 반영해야 하지만 29조와 380조라는 두 수치만으로도 삼성에 대한 그의 기여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 시대에 삼성은 한국 1위였지만, 그의 시대에 삼성은 한국 1위를 넘어 세계적 기업이 됐다. 아버지의 창업에 이은 그의 수성(守成)은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들을 만하다.
정통성 시비
하지만 이건희의 경영에 명(明)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암(暗)도 적지 않았다. 아들 이재용보다는 덜하지만 그 역시 정통성 문제를 안고 살았다.
반드시 장남이 승계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므로 그가 셋째 아들인 것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1966년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의 여파로 아버지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큰형 이맹희(1931~2015, CJ그룹 이재현 회장 아버지)가 대리경영을 하다가 쫓겨난 뒤에 후계자가 됐기 때문에 그는 '폐세자'인 이맹희를 항상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용우 전 중앙일보 기자의 <삼성가의 사도세자 이맹희>에 따르면 쫓겨난 이맹희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여기저기서 도피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폐세자는 그룹의 압력을 받기만 한 게 아니라 그룹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삼성의 내막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고 동생 이건희와 상속문제를 놓고 법적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재벌체제와 비슷한 원리로 작동했던 왕조체제에서는 폐세자가 언제라도 반군 수장이 될 수 있었다. 이맹희가 세상을 떠난 것은 2015년이고 이건희가 쓰러진 것은 2014년이므로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그 화려한 시기에도 이건희는 큰형의 존재와 자신의 정통성을 항상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