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작가가 12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등단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을 듣고 있다. 2020.10.12
연합뉴스
지난 12일 기자간담회 때 소설가 조정래는 소위 '토착왜구'들을 비판하면서 "민족정기를 다시 세우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반민특위는 반드시 부활해야 합니다"라고 한 뒤 "일본의 죄악을 편들고 역사를 왜곡하는 민족반역자들에 맞서는 운동에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려 합니다"라며 친일청산의 필요성을 촉구했다.
바로 옆에서 일본 우익이 자꾸 꿈틀대고, 안에서는 그들과 보조를 맞추는 친일파나 토착왜구들이 지난 75년간 과거사 정리를 저지하며 한국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조정래가 10월에 쏟아낸 이 한(恨)은 75년간 축적된 우리 사회 전체의 한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한은 71년 전 이맘때 특히 많이 생성됐다. 조정래가 여섯 살 되던 해인 1949년 10월, 이 땅에서는 역사를 퇴행시키는 죄악이 벌어졌다. 조정래가 "반드시 부활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한 바로 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친일파와 이승만 정권이 해체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반민특위는 이때 갑자기 해체된 게 아니라 지속적인 공격을 받다가 해체됐다. '마침내'를 뜻하는 한자 수(遂)를 써서 반민특위 해체를 보도하는 기사들이 나온 것은 그것 때문이다. 1949년 10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반민법개정법 등 4일부 수(遂) 공포'는 반민특위의 최후를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아래 기사 속의 급(及)은 '~와, ~과'를 의미하고, '계속(繫屬)'은 사건이 법원의 재판 대상이 돼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과반 국회를 통과한 반민족행위처벌법 중 개정법률과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조직법 급(及)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부속기관조직법 폐지에 관한 법률이 지난 4일부로 공포되었다. 이 법률은 모두 공포일로부터 실시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반민 재판은 단심제로 대법원에서 하게 되었으며, 범죄 수사와 소송절차 급(及) 형의 집행은 일반 형사소송법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사 및 기소는 대검찰청 검찰관이 이것을 하게 되었고, 이 개정법 시행 당시 수사 혹은 심의 중의 사건도 모두 대검찰청 또는 대법원에 계속(繫屬)하게 되었다. 이로써 금후로는 수사·기소 등 수속이 완결되지 못한 것은 대검찰청에서 행할 것이며, 이미 기소되어 있는 사건은 대법원에서 심판을 하게 된 것이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조직법은 국회에 설치된 반민특위의 세부 조직에 관한 법률이고,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부속기관조직법은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 및 반민족행위특별검찰부의 세부 조직에 관한 법률이다.
10월 4일자로 반민특위·재판부·검찰부가 사라지지만, 반민족행위처벌법은 폐지되지 않고 개정만 됐다고 했다. 친일파와 이승만 정권이 반민족행위처벌법만큼은 남겨놓은 것을 놓고, 이들이 최소한의 양심은 갖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본문 3개 장과 총 32개조(부칙 포함)로 돼 있었다. 제1장은 '죄', 제2장은 '특별조사위원회', 제3장은 '특별재판부 구성과 절차'였다. 제2장과 제3장은 친일파 처벌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한 부분으로 이 법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1949년 10월 4일 개정 때 제2장과 제3장이 없어졌다. 법의 '액기스'가 사라진 것이다. 이로 인해 32개 조문 중에서 8개만 남게 됐다. 친일청산을 위한 특별기구들을 없애고 이 법을 일반 법원의 관할로 넘길 목적으로 이렇게 했던 것이다.
반민'특'위는 친일파들을 상대로 '특'별히 파워를 보여준 기구가 아니었다. 친일파들한테 '특'별히 당한 기구였다. 친일파 시위대가 반민특위 본부를 공격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해 6월 6일에는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일까지 있었다(6·6 사건). 이런 사건들은 '친일파 처벌을 시도하면 이렇게 된다'는 경고를 법원과 검찰에 던지는 것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개정되어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일반 법원·검찰로 사건이 넘어갔기 때문에, 일반 판검사들이 친일파 사건을 철저히 다루기는 힘들었다. 10월 4일의 개정을 주도한 세력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다. 실제로 반민족행위처벌법으로 인한 사형집행은 단 1건도 없었고, 감옥에 갇혔던 친일파들도 특위 해체 뒤 전부 다 감옥 문을 열고 햇빛을 보게 됐다.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8개월도 안 됐을 때인 1951년 2월 14일이었다. 이날 법률 하나가 통과됐다. 조문도 없이 본문 1개 문장으로 구성된 법률이었다. "법률 제3호 반민족행위처벌법과 동(同)개정법률 제13호, 제34호 및 제54호는 폐지한다"라는 반민족행위처벌법 폐지법률이었다.
1949년 10월에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완전히 폐지하지 못한 친일파 세력은 1·4후퇴로 서울을 빼앗겨 국민들이 정신없을 때를 틈타 이렇게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뿌리째 뽑아버렸다. 그 전쟁 와중에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마음에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김종인의 조부, 김병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