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전문 졸업식 사진
윤동주 기념사업회
이 행복은 얼마 가지 않았다. 2학년이 되는 해에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일제 역시 본격적으로 전체주의 광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일제는 황국신민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80%에 가까운 조선인이 창씨개명을 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직장에서 해고당하거나 월급을 받지 못했다. 학생은 학교에 갈 수 없었고, 만약 학교가 그런 학생을 정학시키지 않으면 폐교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희전문도 예전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윤동주는 거대한 역사의 물결 앞에 선 작은 청년에 불과했다. 기독교와 민족, 자기정체성이 모두 핍박받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더구나 이 청년은 언어까지 빼앗겼다. 문학과 민족을 사랑한 청년 윤동주에게 자기 민족의 언어로 시를 쓰지 못하는 상황은 괴로운 일이었다.
윤동주는 1년을 절필함으로써 당시 받은 충격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팔복>이라는 시에서 처음으로 불신앙을 드러냈다. 성서에서 약속한 8가지 복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호소였다. 윤동주가 하나님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음을 떠올려보면 그가 얼마나 절망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유학을 결심하다
이후 그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많은 변화가 생겼다. 윤동주의 시에서 분열이 노정된다. 윤동주 문학을 분석하며 흔히 분열된 자아를 거론하는데, 주로 이 시기 이후의 시들이 그러한 성향을 띤다.
문학에서 표현된 자아의 분열은 윤동주의 인생사에서도 드러난다. 일본 유학을 결심한 것이 대표적이다. 더는 이 땅에서 시를 쓸 수 없게 된 시점에 내린 결정이었다. 윤동주가 문학을 사랑한 청년임을 감안하면, 이 시기의 문학이 자아의 분열을 나타내었음을 생각해보면, 타협점으로 일본 유학을 결행하였을 수 있다.
그러나 문학 너머 역사에 대한 책임감 또한 강하게 느꼈다. 무엇을 해도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무력감과 패배감 속에서도 역사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양심. 절대 절망 속에서 양심의 안간힘을 다하면서 윤동주는 송몽규와 뜻을 같이하기로 한다. 나중에 일경에 체포되어 작성한 일본 유학 동기는 송몽규와 같다. 조선독립을 위해서 민족 문화를 연구하기로 하였고 그러려면 전문학교 정도의 문학 연구로는 부족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윤동주는 답했다.
그렇다고 윤동주의 일본 유학 동기가 전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한 문화 연구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윤동주는 원래 문학 자체를 사랑한 문학인이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문학을 사랑하는 청년으로서 자신이 동경한 시인 정지용의 학교(경도제국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 또한 품었을 것이다. 동시에 문학이 민족운동에 (현 단계의 무장투쟁보다) 더 도움이 된다는 송몽규의 주장에 분명 동의해 유학을 결심한 측면 또한 있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당시 유학을 위해서는 창씨개명이 필수였기 때문에 원서 제출 하루 전까지 창씨개명을 미루다 결국 '히라누마 도오쥬(平沼東柱)'로 이름을 바꾼다. 이후 쓴 시가 <참회록>이다. 윤동주는 <참회록>에서 거울을 보기 위해 손뿐만 아니라 발까지 써가며 거울을 닦는다. 이렇게 부끄러워하면서까지 그는 일본으로 떠났다. 그러곤 돌아오지 못했다.
타향에서의 죽음,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1942년 윤동주는 도쿄에 소재한 릿쿄 대학에 진학한다. 1학기 만에 경도에 있는 기독교 대학 도오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을 간다. 송몽규가 있던 경도로 향한 것이다. 이 결정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고 윤동주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송몽규가 독립운동 혐의로 이미 감옥에 다녀와 '요시찰인' 명부에 올랐기 때문이다. 요시찰인은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들의 밀착 감시 대상이었다. 윤동주는 일제의 감시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1943년 3월 일본 정부는 '조선인 징병제를 8월부터 시행한다'라고 공표했다. 당시 많은 조선인은 일본이 자신들을 총알받이로 사용하려 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러나 식민지 출신의 군사를 뽑는 것은 일본 정부에도 매우 꺼림칙한 일이었다. 징병하여 군대에 편입하기 위해서는 군사교육을 시켜야 한다. 결과적으로 민족독립운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군사교육을 일본 정부가 대신해주는 꼴이 되어버릴 수 있었기에, 일제는 1943년까지도 조선인 징병을 꺼렸다.
일제가 조선인 징병을 시행한 것은 물불 가리지 않아야 할 정도로 다급해졌다는 의미였다. 이면의 흐름을 인지한 송몽규는 징병에 적극 찬성했다. 그는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알지 못했지만 징병제도의 실시로 새로운 무기를 갖춘 군사지식을 체득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일본의 전세가 기울 시점에 조선 독립에 힘이 될 수 있다는 견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