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3월 10일 민자당 최고위원이 된 김영삼이 국회 구 민주당 총재실에서 박철언 정무장관의 예방을 받고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렇게 성사된 3당 합당은 그때까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김영삼과 박철언이 민주자유당 안에서 공동운명체가 되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두 사람을 라이벌 관계로 엮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적 경륜에서는 김영삼이 월등히 앞섰지만, 박철언이 황태자로 불릴 만한 입지를 갖고 있었기에 이런 구도가 성립할 수 있었다. 이 구도 속에서 황태자 박철언은 자기 위상의 상당 부분을 김영삼과 공유한 채 김영삼을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됐다.
그런데 이 경쟁은 엄밀히 말하면 김영삼 대 민정계의 경쟁 또는 민주계와 민정계의 경쟁이었다. 박철언은 노태우 대통령과 민정계의 이해관계에 입각해 김영삼과 경쟁했다. 김영삼과 경쟁하는 박철언은 '개인 박철언'이라기보다는 '민정계 대리인' 혹은 '노태우 대리인' 박철언이었다.
민정계가 김영삼과 한 배를 탄 것은 민중혁명을 차단하고 보수정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김영삼을 적절히 활용해 위기를 극복하자는 정도의 생각이 있었을 뿐이다. 2005년에 <한국학 연구> 제22권에 실린 정태환 고려대 교수의 논문 '김영삼 정권의 등장 배경과 주요 정치세력의 역학'에 이런 대목이 있다.
노태우와 민정당은 기득권을 어떤 방식으로 보전하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에, 정통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을 끌어들여 간판 스타로 활용해 민정당 세력을 안존시키고, YS에 대한 사실상 무력화를 시도하여 실질적 기득권을 차기 정권에도 그대로 유지하자는 계획이었다.
4·19 혁명, 6월항쟁, 촛불혁명의 공통점은 기존의 보수집권당이 대선 후보급 지도자를 상실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세 사건 뒤에 보수진영이 내각제 개헌을 선호하거나 추진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시민혁명의 직격탄을 맞은 정당이 직선제 대통령 후보를 내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김영삼을 막아라
6월항쟁 이후의 민정당은 그런 인물난에 시달렸다. 이 인물난은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민자당을 계승한 역대 정당들에서 대통령 후보들이 배출되기는 했지만, 여기서 배출된 유력 주자들 가운데 민정계는 없었다. 김영삼·이회창·이명박·박근혜는 신군부 출신의 민정계와 다른 길을 걸은 사람들이었다. 노태우를 끝으로 유력한 민정계 대권 주자들이 단종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철언은 김영삼이 대권 후보를 꿈꾸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맡았다. 그가 시도한 방법 중 하나는 김영삼의 '돈줄' 죄기였다. 이 점은 1991년 7월 27일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호남 출신이지만 노태우 친위 세력인 최영철 정치특보가 그날 재벌기업 관계자들에게 했던 발언은 박철언의 의중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강준만 교수의 <김영삼 이데올로기>는 그날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민자당 내부 투쟁은 사실상 돈줄 싸움이었다. 그 유명한 7·27 파동도 그런 돈줄 싸움과 무관하지 않다. 91년 7월 27일 당시 대통령 특보 최영철은 전경련 산하의 대기업 경영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특강을 통해 '김영삼 대표는 민자당의 차기 대권후보가 되기 어렵다'고 거의 단정하다시피 했다. 당시 언론은 이 발언이 정치자금 공급원인 재벌들에게 김영삼에 대한 지원을 자제하라는 통보를 한 것과 다름없다는 해석을 내렸다.
김영삼과 박철언의 경쟁은 이 외에도 다양한 양상을 띠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박철언이 배후에서 선공을 날리면 김영삼이 받아친 뒤 역공을 가하는 식이었다. 이 양상은 3당 합당 얼마 뒤부터 나타났다.
1990년 10월 25일, 합당 당시에 내각제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언론에 공개됐다. 이 상황이 굳어지면 김영삼의 대통령 꿈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배후에 박철언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 상황에 맞서 김영삼은 사태를 한층 더 악화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김영삼은 내각제 포기를 요구하고 당무 포기를 선언했다. 또 탈당을 할 듯이 하는 방법으로 노태우와 민정계 그리고 박철언을 압박했다. 이런 반격은 상대방을 당혹게 했다. 민정계가 도리어 상황 정리를 시도해야 할 정도였다. 1990년 11월 1일 자 <경향신문> 1면 톱기사 '민주계 탈당도 불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의 내각제 포기 요구로 분당 위기를 맞고 있는 민자당은 당내 민정·공화계 측이 수습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민주계 측에서 내각제 포기 선언이 수용되지 않을 경우 탈당 불사론까지 제기하고 있어 수습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내분 상태가 장기화할 전망이다.
김영삼은 박철언이 만든 상황을 한층 더 꼬이게 하고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결국 노태우와 박철언은 내각제 개헌을 포기하는 것에 더해 대표 권한 강화라는 덤까지 얹어주는 방법으로 김영삼을 달래야 했다. 김영삼이 당을 깨고 나가면 노태우 정권은 3당 합당 이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노태우와 박철언에겐 악몽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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