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점승은 이제 사회복지사, 중독치료전문가로 우뚝 섰다.
민병래
문점승은 몸을 일으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언제 병실에 들어왔는지 기억이 없다. 멀리 은행나무는 새벽 찬비 탓인가 마른 가지들이 똑똑 부러진다. 창틀에는 젖은 낙엽 두어 장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그는 여윈 팔을 들어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날카롭게 맨살을 파고든다. 문점승은 진저리치면서 한 뼘 간격으로 창문을 가로지르는 쇠창살을 만져보았다. 손아귀에 꽉 들어차는 굵기다.
2005년 3월, 문점승은 서울 성동구의 용비교 밑에서 응봉산을 바라보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응봉산을 뒤덮은 개나리는 술 한 잔이 들어가면 물결쳤고 또 한 잔이 들어가면 날갯짓을 하고 다시 한 잔이 들어가면 커다란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올랐다.
땅을 베개 삼아 하늘을 이불 삼아 거리를 헤맨 지 벌써 몇 해이던가? 다시 문점승은 막걸리병을 땄다. 나비는 하늘 높이 오르며 함께 가자고 문점승에게 손짓을 한다. 나비가 멀어져 어슴푸레 보일 때 문점승은 비틀대며 일어났다. 그때 갑자기 나비가 땅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렇게 쓰러진 문점승을 그의 형이 긴급 치료를 받게 한 후 청량리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폐쇄 병동 신세가 벌써 세 번째다. 문점승이 정신이 들어 병실 창살을 만졌을 때는, 정신을 잃은 지 6개월이나 지난 가을날 어느 아침이었다.
아내가 떠나가고 노숙계에 입문하다
"'너네 아빠 술 취해서 길거리에서 잔다'고 애들이 놀릴 때 창피했어요. 아빠는 술 먹으면 동네 강아지들하고 싸워서 엄마랑 같이 끌고 올 때가 많았어요. 아빠가 술 먹고 일도 안 나가서 엄마가 여관에 다니며 청소를 했어요. 엄마 도와주려고 주유소에도 가보고 신문 배달도 하려고 했는데 어려서 안 된다고 해 속상했어요."
판사의 물음에 아들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문점승은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하는 얘기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저 녀석이 저렇게 말을 야무지게 했나? 지 엄마가 시켰나?" 돌아보니 아내는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2003년, 이혼 소송에 출두하라는 마지막 통보를 받고 나간 법정에서 아들의 증언은 판사의 마음을 움직였다. 법정을 나서니 어느새 아들과 애 엄마는 종종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경남 진주가 고향인 문점승은 중학교 때 풋술을 배워 술꼬가 터진 인생을 살았다. 가을 추수 때 문점승의 아버지는 벼 베기를 마치고 막걸리를 사발에 철철 넘치게 따라 한 잔을 마셨다. 벌컥벌컥 들이키니 막걸리는 입술 옆으로 흘러내렸고 아버지는 '캬' 하며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논두렁에서 일손을 돕던 문점승에게 그 모습은 눈이 부시게 다가왔다.
이웃집 수확을 도와주러 아버지가 걸음을 옮기자 문점승은 막걸리를 한 대접 그득 따라 한 모금씩 마셨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들이키니 멀리 아버지의 뒷모습이 기우뚱거렸고 나중에는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했다. 그가 깨어난 곳은 다음 날 아침, 집이었다.
진주중학교 운동장에 모여 입대를 하는 날, 친구들은 기차로 갔지만 그는 술에 곯아 떨어져 다음 날 혼자 헌병대 지프차를 타고 춘천에 있는 103 보충대에 들어갔다. 입대하는 날부터 관심 사병이 되었고 제대할 때는 승리부대 15사단의 꼴통이 되었다.
1988년 결혼해서 제주도로 신혼여행 간 날, 군대 선임을 만나 밤새 술을 먹고 그를 끌고 아내가 있는 여관방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했다. 성수동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그는 술독에 빠져 살았다. 성수동 작은 공장에서 밀링이나 선반으로 쇠를 깍던 그는 점심에 반주로 시작해 야근이 끝나면 세 병이고 네 병이고 끝이 없이 마셨다.
문점승이 술에 취해 골목길에 들어서면 동네 강아지들이 몰려나와 으르렁거렸다. 뚝섬에서 원정 온 개도 있었다. 문정승은 발로 내지르고 소리 지르다 제풀에 지쳐 길거리에 누워 잠들었다. 아내와 아들이 "동네 창피하다"고 끌어다 집에 눕힌 게 부지기수, 다음 날은 해장술을 먹는다고 회사를 안 나갔다. 98년 아내는 지친 나머지 애들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아내가 떠나간 후, 그는 술 한 병을 옆에 차고 아침이면 성수동을 출발, 중랑천과 뚝섬 일대를 돌아다녔다. 어느 날은 서울역까지 진출했다. 그곳에서 노숙인들과 오랜 벗을 만난 듯 술잔을 나누었다. 이름도 알 필요 없고 나이도 상관없고 서울역에 온 연유도 묻지 않고, 단지 술을 주고받고 취하면 쓰러져 자는 '노숙계', 그는 기꺼이 입문했다. 성수동에 방은 그대로 있었지만 빈 집에서 혼자 먹는 술은 맛이 없어 서울역에 아예 둥지를 틀었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내니 쉰도 안 된 그에게 간경화와 황달, 알코올성 당뇨에 조울증이 찾아왔다. 복수까지 차올라 어느 날은 술병을 꺼내려 진열장을 열다가 쓰러지기도 했다.
노숙인을 위한 성프란시스 대학에 입학하다
"문점승씨, 성프란시스대학에 한 번 들어가 볼래요?"
"네, 그게 뭔데요?"
"노숙인 다시서기센터장 임영인 신부님이 노숙인을 위해 만든 인문학학교예요."
문점승은 용비교에서 쓰러져 입원했던 청량리 정신과병원에서 은인을 만났다. 그는 대학교수였다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학교에서 쫓겨나고 폐쇄병동에까지 입원했던 인물이다. 나중에 재활에 성공한 후, 알코올중독 환자를 위해 살겠다고 중독치료 상담사가 되었다.
문점승은 그의 손에 이끌려 '단주모임'에 참여했고 처음으로 "다시 태어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의 권유로 정신병원에서 퇴원 후 알코올중독자 재활시설 '감나무집'에 입소, 공동체생활을 하던 중에 감나무집 소장으로부터 '성프란시스대학' 입학을 권유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