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시스 대학 9기 졸업여행 사진가운데 목도리를 한 사람이 김동훈 교수다
민병래
그 길은 외롭지 않다
"보건복지부 간부도 실은 올해 초에 2021년부터는 지원을 끊겠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다시서기센터장 허용구 신부의 얘기에 어디선가 '끙'하는 신음소리가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개교할 때부터 꾸준히 연간 6천~7천만 원 정도를 지원했던 대기업의 후원이 2020년 2월 부로 끊겼다. 이런 상황에서 보건복지부마저 내년부터는 예산을 없애겠다고 하니... 15년을 꿋꿋이 버텨오면서 248명에 이르는 졸업생을 배출했건만...
2학기를 준비하는 회의에서 허용구 신부의 말이 끝나자 김동훈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오히려 좋은 기횝니다. 이번을 계기로 성프란시스대학을 시민운동 차원으로 새롭게 탄생시켜보지요." 모두들 귀를 기울였지만 분위기는 무거웠고 침묵은 가시지 않았다. 창문 밖으로는 먹장구름이 어깨를 벌리고 매달려 있었다. 김동훈은 다시 "안 가본 길을 한번 가 보지요"라고 힘을 주어 말했다.
사실, 김동훈은 진작부터 시민의 힘으로 성프란시스대학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부 선교 단체에서 배식을 하면서 기자들을 동원하는 모습이나 겨울 방한복을 나눠주면서 교회 이름을 대문짝만하게 새겨 넣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서울시에서도 끊임없이 성공 사례, 재활 사례를 수치로 요구했다.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또한 시혜의 대상이고 홍보의 재료로 여겨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벼랑 끝에 섰으니 답은 시민운동밖에 없었다.
김동훈은 교수진과 운영진에게 두 가지를 제안했다. 하나는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15년간 쌓인 졸업생들의 글을 '빗물 그 바아압'으로 발간하자는 것이었다. 2020년 8월 19일 500만 원을 목표로 시작했는데 고맙게도 불과 일주일도 안 된 8월 24일 목표를 달성했다. 또 하나는 후원회원 사업. 소식을 정기적으로 알리면 많은 이들이 동참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를 위한 수단, 웹진을 만들어 7월에 창간호를 냈다. 이제 2호, 3호를 준비 중이다.
어려운 시기에 고맙게도 올해 학장으로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이 취임했다. 그는 "전국 17개 시도에서 인문학 과정이 노숙인 재활의 핵심 사업으로 정착해야 한다"는 더 큰 목표를 제시했다.
김동훈도 꿈꾸고 있다. 예술사 강의를 계속해 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노숙문제 연구소'(가칭)를 세워볼 생각이다. IMF 이후 우리 사회에 노숙인 문제를 다룬 논문이 800여 개나 나왔다. 나름대로 좋은 문제의식과 대안이 담겨 있다. 그는 이 연구결과들을 담아내되 철학과 심리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해 노숙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정책대안을 제시할 작정이다.
성프란시스 대학에서 "쫓아내기 전에는 안 나가겠다"는 그다.
거리의 인문학자로, 거리의 철학자로 살아가는 게 꿈인 그다
그 길은 외롭지 않다. 많은 길벗 도반들이 함께 할 테니까.
<못다 한 이야기> |
① 텀블벅 클라우드 펀딩을 통해 출간하는 『빗물 그 바아압』은 4기 졸업생 권일혁 선생이 쓴 시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빗물 그 바아압
권일혁
장대비 속에 긴 배식줄
빗물바아압 빗물구우욱 비이무울 기이임치이
물에 빠진 생쥐새끼라 했던가
물에 빠져도 먹어야 산다
이 순간만큼은 왜 사는지도 호강이다 왜 먹는지도 사치다
인간도 네 발 짐승도 없다 생쥐도 없다
오직 생명뿐이다
그의 지시대로 행위할 뿐
사느냐 죽느냐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오로지 먹는 것 쑤셔 넣는 것
빗물 반 음식 반 그냥 부어 넣는 것.
②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 작업은 목표액을 채웠지만 2020년 10월 19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지금도 동참이 가능하다. https://tumblbug.com/stfrancishumanities?ref=discover
③ 성프란시스 대학의 홈페이지주소는 https://stfrancishumanities.tistory.com/이다. 더 많은 얘기는 이 곳에서.
④ 김동훈 교수는 2019년 독일철학자 고틀리프 바움가르텐(1714~1762) 이 라틴어로 쓴 『미학』을 번역했다. 또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데이비드 흄의 『취미의 기준에 대하여/비극에 대하여』도 함께 번역해 '미학원전시리즈' 1차분으로 출간되었다.
⑤ 클레멘트 코스는 미국의 사회비평가 얼 쇼리스는 1995년 빈곤문제와 관련해 글을 쓰던 중, 살인사건에 연루돼 8년째 복역중인 여죄수를 만나 인상적인 문답을 나눈다.
"사람들이 왜 가난하다고 생각하나요"
"우리가 가난한 건 정신적인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인 삶이란 무엇을 말하지요?"
"저기 저 곳에 있는 극장과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거죠"
이 대화로 얼 쇼리스는 가난으로 몸이 망가지고 정신도 황폐해진 이들에게 인문학교육이 필요하다는 영감을 얻었다. 그는 곧바로 윤리철학, 예술, 역사, 논리학 등을 강의하는 클레멘트 코스를 열었다. 뉴욕 인근에 사는 마약중독자, 노숙자, 매춘부, 실업자, 전과자들 31명이 첫 수강생이었다. 모두 얼 쇼리스의 교육이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31명 중 17명이 1년 후 수료증을 받았고, 수료생 중 14명은 뉴욕 바드대의 심사를 거쳐 학점을 취득했다. 이들 중 2명은 공부를 계속해 치과의사가 됐고, 전과자였던 여성은 약물 중독자 재활센터의 상담실장이 되었다. 이를 본받아 클레멘트 코스는 4대륙 (미국, 멕시코,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확산되어 현재 53개 코스가 운영 중이다.
⑥ 초대학장 임영인 신부가 노력한 덕분에 삼성코닝(2015년에 미국계 회사와의 합작사에서 미국계 기업인 코닝정밀소재로 바뀐다)은 해마다 지원을 해왔다. 그런데 코닝이 아산시로 이사를 하고 지역사회 봉사를 기본으로 미국 본사 방침에 따라 서울에 소재를 둔 성프란시스대학에 대한 지원이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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