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개의 건반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나인틴헌드레드처럼

검토 완료

성태영(yonbora)등록 2020.08.26 11:54
  신영복 선생께서 타인이 붓글씨를 쓰는 것을 보면 낭만과 여유가 흘러넘치지만, 정작 글쓰는 이에게는 그보다 더 긴장되고 숨 막히는 일은 없다고 했다. 화선지에 실수로 먹물 한 방울이라도 튈까 한 획이라도 잘못 그을까 글을 완성할 때까지 작품과 폐지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한다. 나에게 피아노 연주도 마찬가지다. 노래하면서 눈을 감고 선율에 손을 맡기고 건반을 누르는 것은 아득한 이야기다. 그 순간을 즉흥적으로 연주해내는 재즈 뮤지션은 나에게 신과 같은 존재다. 그저 악보가 틀릴까 전전긍긍하며 암기과목을 외우듯 하나 하나 익히는 내가 조금이라도 여유를 찾을 때는 악보를 독파하고 난 후, 그제야 그 시간이 찾아온다.

  피아니스트 나인틴헌드레드는 피아노로 가득 찬 자신의 세상에서 자유로웠다. 아이러니하게도 88개의 건반으로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한정된 세상 안에서 맘껏 가지고 놀 수 있었다 말한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 거대해서 막막하고 두려워 감히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피아니스트의 전설; The Legend of 1900>, 1900년 새해 첫날 호화유람선 버지니아호에 아이가 버려진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 나인틴헌드레드. 한 번도 배 밖의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그는 유럽에서 기회의 땅 뉴욕을 왕복 운행하는 버지니아호에서 성장하고 피아노연주가로 살아간다.

  연주하다 흥이 오르고 자신만의 이야기가 꿰어지면 오케스트라도 합주를 포기한다. 또 시작이군! 하면서 그에게 무대를 내어준다. 신사복을 빌려 입고 귀족들 사이에 처음 낀 청년, 젊은 애인과 승선한 나이 많은 귀부인, 오랜 항해에 지친 빼곡히 들어찬 삼등석 사람들의 풍경,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나인틴헌드레드에게 영감을 주고 음악을 통해 타인과 교감한다. 육지에서는 존재해본 적이 없는 그를 오로지 버지니아호만이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주었다. 단단한 육지보다 울렁거리는 배가 익숙한 그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피아노의 브레이크를 풀고 연주하는 <Magic Waltz>는 천진난만하고 장난기 가득한 그를 닮았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울렁거리고 아찔하고 짜릿하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머리 위로 떨어질 뻔한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발랄한 연주는 끊이질 않는다.

  묘하다. 나인틴헌드레드는 '배'라는 제한된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망망대해를 내다보고 대륙과 대륙을 이동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88개의 정해진 피아노 건반으로 무한한 음악의 세계를 연주해낸다.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는 듯하지만, 편견 없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이해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도전장을 내민 재즈의 대가가 연주하는 곡을 듣고, 경쟁과 질투보다 더 진한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인터넷 검색만 하면 손쉽게 악보를 내려받을 수 있는 세상에 사는 내가 과연 그보다 자유롭다 할 수 있을까. 가끔은 피아노를 치는 것이 나를 악보의 세상에 가두고 틀리면 안 된다는 강박의 틀에 끼워 넣는 것이 아닐까 답답한 마음도 든다. 그래서 나인틴헌드레드의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연주가 부러웠고 끝까지 배를 떠나지 않겠다는 선택까지도 자유의지로 읽혀서 안타깝지만 슬프지 않았다.

  이 영화는 <시네마 천국>의 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와 음악감독 엔니오 모리코네의 조합이 만들어내 또 다른 걸작이다. 2000년 골든글로브 음악상을 수상했다. 나인틴헌드레드의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렇게 훌륭한 음악으로 옮겨놓았다니 주세페 토르나토레와 엔니오 모리코네는 데칼코마니 같은 친구였지 싶다.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노베첸토』(Novecento)가 원작이고, 나인틴헌드레드역의 팀 로스는 원래 직업이 피아니스트인가 싶어 영화가 끝나자마자 검색해보았다. 전혀 피아노를 치지 못하던 그가 6개월 맹연습으로 이 정도 장면을 연출해내다니 그가 아닌 나인틴헌드레드는 상상할 수 없다.

  8살짜리 나인틴헌드레드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연주하는 <A Mozart Reincarnated>, 첫눈에 반한 소녀를 향한 <Playing Love>,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피아노 배틀신의 원조격이라 하는 재즈 연주가 젤리 롤 모튼과의 숨막히는 배틀신. 엔리오 모리꼬네의 음악은 각각의 장면과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영화 속에 녹아있다. 상영관도 회차도 많지 않아 그리운 연인을 찾듯 다시 어렵게 찾아본 이 영화와 음악은 습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와 함께 내 피부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온몸에 스며들어 묵직해진 몸을 바닥에 붙이고 깊은 잠을 자게 되지 싶다. 세차게 퍼붓는 장마 빗소리가 세상의 소리로부터 나를 떨어뜨리고 내 세상을 공고히 해서 한동안은 그 여운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