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비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그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철학자들이 약 300년간 국정을 주도하는 것은 세계사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학자들이다 보니 학술 토론을 좋아해서 훗날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당쟁과 탁상공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오명을 쓰기는 했지만, 철학자들이 경제와 군사를 통제하며 나라를 이끌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 같은 철인 정치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한 두 사상가가 있다. 화담 서경덕(1489~1546)과 퇴계 이황(1501~1570)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이(理)와 기(氣)로 우주 만물을 해석하는 이기론 논쟁을 펼치면서 사림파 시대의 철학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기론 논쟁은 흔히 이황과 율곡 이이의 대립 구도로 설명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이는 서경덕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서경덕과 이황을 절충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명확한 대결 구도를 보인 쪽은 서경덕과 이황이다.
황진이·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개경 3대 명물)로 손꼽히는 서경덕은 황진이의 '정신적 연모의 대상'이자 스승으로도 유명했다. 허균이 쓴 <성옹지소록>에 따르면, 살아생전의 서경덕과 함께 술과 거문고를 즐겼던 황진이는 서경덕 사후에도 그의 농막(논밭 근처에 간단하게 지은 집)을 찾아가 술과 거문고를 즐기곤 했다고 한다.
황진이는 관직을 멀리하고 육체적 필요를 통제하며 철학적 탐구에 빠져 살면서, '천하의 황진이'인 자신을 여성이 아닌 친구처럼 대해주는 서경덕을 성인 군자로 존경했다. 이처럼 서경덕은 당대에 가장 유명한 관기(기생)의 우러름을 받으며 철학 연구에 매진했다.
이황은 평생 학문에만 전념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우리 시대에 생겨난 관념에 불과하다. 박정희 정권이 1968년 국민교육헌장 반포 뒤에 국민윤리의 상징적 인물을 부각할 목적으로 영남 출신인 이황을 대대적으로 띄우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이다.
박 정권에 이용되기는 했지만, 이황은 한국사 발전에 커다란 공로를 세운 인물이다. 집권세력이자 구세력인 훈구파에 의해 개혁세력인 사림파가 한창 탄압받을 때 청년기를 보낸 이황은, 사림파가 조직을 유지하면서 1567년 집권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42세 때인 1543년에 성균관 사성(종3품)으로 승진했다가 사표를 쓴 이황은 이때부터 1558년까지 무려 20여 회나 관직을 사퇴하거나 관직을 고사했다. 그는 한 발은 학문에 담그고 한 발은 정치에 담근 상태에서 정계의 문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는 '개혁파 지도자로서 개혁을 달성할 필요성'과 '훈구파의 탄압으로부터 개혁파를 보호할 필요성'을 적절히 저울질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신중하다고도 할 수 있고 소심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같은 '치고 빠지기'를 통해 이황과 그 추종자들은 훈구파의 공세를 피해 가며 힘을 서서히 키울 수 있었다. 이 방식은 이황 자신이 학문 연구와 정치 활동을 병행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결국 그는 사림파의 집권을 목도한 지 3년 뒤에 6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백성이 먼저냐, 국가질서가 먼저냐
서경덕은 사림파 집권 21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이황은 집권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 다 사림파가 비주류일 때 생존했던 것이다. 이처럼 사림파가 한창 투쟁할 때 철학 연구를 했기 때문에 이들의 철학 사상 역시 건강할 수밖에 없었다. 크게 보면 동지관계이지만, 두 사람은 성리학적 세계관인 이기론 문제에서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서경덕은 '기'를 중시하는 주기론, 이황은 '이'를 중시하는 주리론에 섰다.
서경덕은 우주의 기본 단위인 '기'가 우주의 법칙인 '리'보다 먼저라고 생각했다. 삶과 죽음을 논한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에서 "(기)는 끝없는 허공에 가득 차 있다"면서 "그것이 크게 모이면 천지가 되고 작게 모이면 만물이 된다"고 말했다. 그 같은 기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가 형성된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기'가 '이'보다 먼저라는 그의 이론은 기일원론(氣一元論)으로 불린다.
이황은 서경덕을 비판했다. '이'가 있고 나서 '기'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퇴계선생문집> 제25권에 실린 '고요하여 조짐은 없지만 만물은 이미 갖춰져 있음을 논함(論沖漠無朕萬象已具)'에서 "이는 사물이 있기 전에 먼저 '이'가 있음을 말한 것이니, 임금과 신하가 있기 전에 이미 임금과 신하의 '이'가 있었고 아버지와 아들이 있기 전에 이미 아버지와 아들의 '이'가 있은 것과 같다"는 주자의 말을 인용했다.
'기가 먼저냐 이가 먼저냐'는 현실적인 정치 문제와도 맞닿았다. 나라로 비유하면 '기'는 백성이고 '이'는 국가질서다. '기'가 먼저라는 입장은 백성이 국가질서보다 먼저라는 이념과 연결된다. '이'가 먼저라는 주장은 국가질서의 우위를 강조하는 입장과 연결된다. 그래서 한국사 시간에 설명되는 것처럼 주기론은 진보, 주리론은 보수와 연결되기 쉬웠다.
해석의 차이가 낳은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