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고 가난한 예술가들 가까이에 사는 일

실패도 좌절도 이들을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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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shinkim00)등록 2020.08.19 09:44
** 돌아보면 그 때는 이주를 꿈꾸고 있었지만 제주도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때다
아직 서울에 살던 2016년 4월에 성수동 재미공작소라는 곳에서 열린 인디 가수 공연에 갔다. 성수동은 2010년대 들어서 가난한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떠오른 동네였는데 막상 가보면 어디 가서 뭘 봐야할지 알 수 없었다. 성수동에 있는 재미공작소 블로그를 이따금 들여다 보다가 이날 공연을 예약했다. 공연장은 딱히 음향시설도 없는 상점이었고 가수 세 명은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도마라는 이름의 가수는 '주방에 있는 그 도마 맞아요'라고 설명하고는 <황제펭귄이 겨울을 나는 법>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극지의 극단적인 추위를 보드라운 알을 품고 다닥다닥 붙어선 토실토실한 엉덩이로 이겨낼 수 있다는 가사가 '뚱 뚜둥 뚱 뚱뚱뚱!'하는 기타 소리에 실려 반향판도 없는 실내에 퍼졌다. 알지 못했던 가수의 알지 못했던 노래가 몸을 감쌌다. 공연장을 채운 낯선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노래가 토실토실한 엉덩이라도 된 것 같았다. 공연이 끝나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아주 오랫만에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매일 살아 숨도 쉬고 삼시세때 밥을 먹으면서도 실감하지 못했던 느낌이었다. 숨쉬기를 잊었다가 오랫만에 다시 숨을 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제주도로 이주한지도 벌써 4년차이다
2020년 5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작은 공연이 열렸다. 해군기지가 있는 강정마을 한복판에는 평화활동가들이 운영하는 평화센터가 있고 주변 주택에서는 평화활동가들이 살고 있다. 해군기지반대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평화센터를 포함한 일대 부지가 얼마 전에 팔려 평화센터는 헐리고 평화활동가들은 이사를 나가게 되었다. 이번에 집을 옮기는 활동가들이 그동안 함께 살았던 집과 텃밭을 떠나며 '우리집에 놀러와 무지개카레네'라는 작은 공연과 전시를 마련했다. 주방장 언니와 나는 토요일 저녁에 가게 문을 일찍 닫고 공연을 보러 갔다.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올레(골목길, 제주도에는 대문이 없는 집이 많은데 큰길부터 마당이 시작되는 곳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올레라고 부른다.)가 시작되는 곳에서 문진표를 작성하고 관객 전원이 마스크를 쓰고 안내자를 따라서 올레를 걸어들어갔다.
올레 중간에 (그린씨라고도 부르는) 무지개가 담을 향해 쭈그리고 앉아서 뭔가 하고 있다. 안내자가 무엇을 하는지 물으니 무지개는 그동안 같이 살았던 방풍나물을 화분에 담아 새로 살 집으로 같이 이사갈 것이라고 한다. 무지개는 방풍나물 한 뿌리를 화분에 옮겨 담고 일행과 함께 집 앞으로 간다. 올레가 끝나는 곳에는 빨간 벽돌집과 정돈되지 않은 너른 텃밭이 펼쳐져 있다. 집 앞에는 텃밭에서 잘라온 민트가 한 가지씩 담긴 병이 놓여있다. 무지개는 공연을 보고 떠날 때 이집 텃밭에서 나온 민트를 한 가지씩 가져가서 뿌리를 내려 우리들의 텃밭이나 화분에 심어달라고 부탁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 관객이 마루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무지개와 함께 이 집에 살던 카레가 이 마루에서 했던 일들을 이야기해 준다. 이 집 마루에서 현수막을 하도 많이 만들어서 현수막 공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어서 무지개가 살던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지개가 쓰던 방 벽에는 비자림 벌목을 반대하며 살았던 비자림로 1번지 오두막이 그려져 있고 안리타 작가의 <사라진다, 살아진다>는 시가 씌여 있다. 무지개가 갈무리한 수많은 토종씨앗이 커다란 상을 꽉 채우고 작은 상에는 녹색 실과 대바늘, 안리타 시집과 농부 시인 김성규 시집이 놓여있다. 무지개의 방을 나와 옮겨 간 카레의 방에는 카레의 가족사진과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사진이 붙어있다. 고향, 고국,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평화운동을 하는 삶을 잠시 상상해 본다. 카레의 방에는 한짝짜리 농이 있다. 카레에게 이 농은 C. S. 루이스의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옷장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옷장을 통해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카레는 한국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서 원래 예정한 1년을 훌쩍 넘겨 8년째 한국에 살고 있다고 한다.
방을 나와  부엌으로 가는 벽에는 카레가 집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적은 긴 글 '집에게 작별 인사'가 씌여 있다. '싱크대 선생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창문 선생님도 감사드립니다.'로 시작하는 인사는 카레가 이 집을 사랑하며 살아온 시간을 이야기해 주었다. 카레를 따라 개수대와 화구가 모두 철거된 부엌으로 갔다. 카레는 강정마을의 다른 숙소에 살다가 이 집으로 처음 이사왔을 때 집 안에 부엌이 있어서, 따듯한 부엌이어서 너무 좋았다고 한다. 이 집에서 철거한 개수대는 카레가 새로 살 집으로 함께 이사갔다고 한다.
카레와 무지개 두 사람이 다 식물을 좋아해서 수전 앞 기다란 창가에 초록 식물을 조로록 늘어두고 아침마다 간단한 식사와 담소를 나누었다. 많은 생각과 의견, 정서가 오고간 따듯한 시간이었다. 지금 부엌 한쪽 벽에는 커다란 초록 잎이 가득 그려져 있고, 창 아래 바닥에는 바깥 텃밭을 들여온 듯 흙과 흙에 뿌리 내린 식물이 무더기무더기 놓여 있다. 무지개는 이 집을 떠나 토종 작물을 가꿀 텃밭이 있는 제주 동쪽으로 이사했고, 카레는 강정마을의 다른 집을 얻었다. 카레는 오늘 공연에 찾아온 손님들을 위해 '무지개(색) 카레'를 만들어 먹기 좋게 자른 바게트에 얹어 두었다. 상에는 무지개떡도 있고, 손님이 나눠먹으려고 가져온 순다리(찬밥과 누룩을 섞은 다음 끓여서 만든 제주도식 발효 음료)와 주방장 언니가 만들어 간 당근케이크도 있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만든 상에서 음식을 조금씩 가져다 먹었다.
준비된 순서는 아니지만 이웃 한 분이 평화센터부터 이 집과 텃밭까지 부지의 주인이셨던 분의 등을 떠밀어 인사를 한 마디 듣자고 부탁했다. 해군기지반대투쟁 여성위원장이셨던 어르신은 그간의 고민과 오늘의 아쉬움, 그동안 집을 아름답게 가꿔 준 무지개와 카레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은 인사를 전하셨다. 우리는 함께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쳤다.  
다시 마루로 나와 무지개와 카레가 이 집에 살면서 찍은 영상을 보았다. 전혀 정돈되지 않은 텃밭에서 방울토마토를 (수확한다기 보다는) 채집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나면 먹고 안 나면 먹지 않는다'며 영상 속의 무지개와 카레도 웃고 있었다. 평화활동가 반디가 다른 친구의 머리카락을 잘라주는 영상이 나올 때는 반대편 창에서 반디와 호수가 앞머리 커트 장면을 동시상연했다.
공연의 마지막은 에밀리와 무밍의 이인무였다. 두 사람은 카레의 방 창문을 무대 삼아 야외공연을 펼쳤다. 대만 출신인 에밀리는 반딧불이로 가장했고 무밍은 무지개와 카레가 사랑해 마지 않은 식물처럼 팔다리를 휘저었다. 처음에 카레의 방 창문 바깥에서 시작해 조용조용 움직이다가 너른 텃밭으로 나가 펄펄 뛰어다니더니 마무리는 다시 조용히 움직이며 집 가까이로 돌아왔다. 공연을 마치고 모두 마루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이 늦었지만 일어서기 아쉬웠다. 카레와 무지개, 에밀리가 앉은 뒤로 카레가 살던 방 문틀 양쪽으로 늘어진 장식을 보고, 무밍이 짓고 에밀리가 아름다운 글씨체로 문짝에 쓴 초대합니다* 글을 보고 있자니 이 집을 보금자리 삼아 살아온 마음이 느껴졌다.
이날 공연을 만든 사람들은 강정마을 평화 활동가들이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작업하는 예술가들이다. 오랫동안 강정마을 네거리를 지키던 평화센터가 없어지고 살던 집을 옮겨야 하는 순간을 포착해서 전시와 공연을 만들었다. 이웃을 초대해서 따듯함과 다정함, 아쉬움과 기억을 간직하고 나누어 주었다. 이들의 삶의 방식, 평화가 잠시 내 일상에도 내려앉았다. 집에 돌아와서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 가까이에 사는 일'을 생각했다. 일상을 멈추고 잠시 돌아보게 하는 사람들, 잠시 머무르게 하는 사람들, 우리가 숨을 들이쉬고 또 내쉬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지치지도 않고 다시 한 번 말해주는 사람들. 젊고 또 가난한 예술가들…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생기거나 제2공항이 생긴다고 하면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찬성하는 사람들에게는 군기지나 제2공항이 이번 생에 모종의 이익을 안겨 줄 것 같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군기지가 안 생기거나 제2공항이 안 생긴다고 해서 이번 생에 무슨 이익을 볼 것 같지 않다. 곶자왈이, 오름이, 숲이 보존되고, 구럼비 바위가 보존되고, 그 안의 다양한 생물종이 보존되고, 바닷속 산호가 건강하게 잘 지낸다 한들 평화운동가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을까? 이익은 우리 모두의 7대손**에게나 있을 것이다. 자본이 정의와 혼용되는 사회에서 자라 자본주의에 순치된 나는 이렇게 가끔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을 본다.
지금 텀블벅에서 강정평화센터를 다시 짓는 펀딩이 진행 중이다. 실패와 좌절에 실망하지 말고 강정평화센터의 공동설립자가 되어 보자. 텀블벅에서 '평화'를 검색하거나 아래 링크로 들어가면 된다.
https://tumblbug.com/gangjung_peace_center?ref=discover
 
 
 
*초대합니다
삶의 터로- 우리집에 초대합니다. 이 곳을 찾은 당신의 집은 어떻게 생겼나요. 어제는 무슨 꿈을 꾸었나요. 창문이 향하는 방향엔 무엇이 있나요. 당신이 좋아하는 물건과 장소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사라지고 살아진다- 집과의 인사 "안녕" 안녕을 묻는다. "다녀오겠습니다.다녀왔습니다. " 작은 불빛의 반딧불이가 날아든다. 반딧불이가 우리를 공연으로 초대한다.
아른거리는 기억, 김이 서리는 창문.
 토종씨앗이 한 해를 살고 한 해를 기다린다.
밭, 토종, 시간을 담은, 이어져 내려온, 생-사.
뿌리로 사는 생의 일년 살이 국화와 민트는 겨울에 바싹 마른다.
봄에 초록잎이 번지고 겨우내 땅 밑에 잠잠하던 뿌리가 잎을 밀어 올린다.
기억장치를 꾸린다.
전선의 피복을 다듬고 구리선을 감는다. 이어질까 불이 들어올까.
넝쿨이 타고 오르므로 장치는 여기서부터 뻗어간다.
'집들이'로 관객을 초대하고 집과의 "안녕"시간을 갖습니다. 전시가 진행되는 곳에서 집들이를 하고 집에 관한 기억들을 모아서 퍼포먼스와 영상 사운드로 공연의 시간을 갖습니다. 공연 후에는 민트와 국화 묘종을 나누어 가지고 가서 자신의 집에 심습니다.
 
**북미 원주민에게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이 7대손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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